우리를 행복으로 이끄는 성인들

[스크랩] 4.고요히 머무는 것을 배우기

샘물 퐁퐁 2010. 10. 18. 10:02

 

 

4.고요히 머무는 것을 배우기



너희는 멈추고 내가 하느님인줄 알아라.  -시편 46,10



우리는 하느님을 시끄럽거나 격동이 칠 때 발견할 수 없다.

자연, 나무, 꽃, 그리고 잔디는 침묵 속에서 자란다.

별, 달, 그리고 태양은 침묵 속에서 움직인다. - 캘커타의 마더 테레사



오지의 부탄왕국은 히말라야의 그림자 아래 조용하게 앉아있다. 수년 전 부탄의 왕은 많은 관심을 끈 이상한 발표를 하였다. 그는 그의 작은 부탄의 국가정책이 국민 총 생산의 증가가 아니라, 국민 총 행복의 증가라고 선포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많은 관광객들과 언론 관계자들은 이 행복한 왕국의 비밀을 발견하기 위하여 그곳에 몰려들었다.

 

방문객들은 그곳의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가난하지만, 참으로 생활에 만족하고 있다는 보고서를 들고 돌아갔다. 부탄은 소위 현대기술문명의 “혜택”이 많이 부족하지만, 그곳의 사람들은 황폐되지 않았다. 어떤 기준에서 보면, 오히려 부러울 만큼 풍요로움을 즐기고 있다.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경제전문가들이 거의 상품가치가 없다고 판정하는 상품이지만 “국민 총 행복”을 평가하는데 중요한 요인인 시간을 그곳 사람들이 손에 쥐고 있다는 것이다.

 

만일 부탄의 주민들이 마술로 뉴욕 맨해튼에 이주한다면 무엇에 가장 관심을 가질까 궁금하다. 아마도 휴대폰을 들고 말하면서, 군중이 가득한 거리를 볼일을 보러 이리저리 헤매고 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이 현재 우리문화의 가장 전형적인 특색일 것이다.

 

한편으로 이런 현상은 “시간이 돈”이라는 규율을 말해준다. 어떤 순간도 “낭비”되어서는 안 된다. 두세 가지를 한꺼번에 할 수 있으면 금상첨화다. 전달매체의 놀라운 발달로 우리는 어떤 순간에도, 대화할 때나 교회에 앉아 있을 때, 혹은 잠을 잘 때에도 항상 끊임없이 대기 중이다. 전화회사들은 이제 “우리 모두가 연결된다”고 외친다.

다른 한편 이 모든 “연결”은 현재의 순간만 빼고 다른 모든 곳에 있으려는 우리의 비참한 욕구를 반영한다.

 

우리에겐 시간이 부족하다. 그래도 우리는 시간을 무서워한다. 우리는 바쁜 일정이 주는 소모적 압력을 불평하지만, 자주 우리가 참으로 아쉬워하는 것은 더 많은 것을 하기 위한 시간이다.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긴 시간, 고독, 혹은 고요함은 두려울 수 있다. 모든 약속을 취소하고 일정을 없애면 우리는 무엇을 하게 될까? 텔레비전을 틀거나 신문을 보거나 전화기를 들어 통화하고, 우리가 그 전에 경험했던 것 보다 더 우리를 소진시킬 어떤 여행을 계획한다.

 

물론 참다운 노동의 정신이 있는 것처럼, 참다운 여가를 즐기는 정신도 있다. 그러나 진짜로 우리를 부추기는 것이 조용히 있는 것을 피하려는 의도라면, 무엇인가 잘못되고 있는 것이다. 행복을 위한 처방은 끊임없이 변화를 갈구하는 욕구를 채우는 것 그 이상이다. 만일 그런 의미의 “행복”이라면 그것은 우리의 진실한 조건을 감추는 위장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성인들은 물론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많은 큰일들을 했다. 그러한 그들의 행위는 고요함을 얼마나 잘 지킬 수 있는가에 달려 있었다. 참으로 그들은 많은 시간을 기도와 관상으로 보냈다. 그러나 그 고요함과 침잠 속에서 그들은 다른 모든 일과 행동을 분별해주는 평화를 발견했다.

 

조용한 장소는 점점 더 드물어지고 있다. 그러나 단지 세상의 소음으로부터 도망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의 내적인 소음의 문제가 여전히 남아있다. 바깥이 조용해도 우리는 내적인 소리와 경고들, 해야 할 일을 상기시켜주고, 잘못 처리한 일들, 과거에 일어난 일들을 상기시켜주는 안의 소리들로 가득 차 있다. 이런 소리들은 끊임없이 시간과 공간으로부터 ­여기 지금으로부터­ 우리가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곳으로부터 우리를 떼어놓으려고 하며 혼란스럽게 만든다. 이 소리들은 만일 우리가 다음 번 마감 때까지 해 치울 수 있다면, 적절한 신용장을 얻기만 한다면, 완벽한 일자리를 얻거나 안정권의 점수를 딸 수만 있다면 미래에 행복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끊임없이 과거에 살거나 미래에 살 것을 준비한다면, 우리가 참으로 깨어 살게 될 것이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산만함 


우리세계는 산만함과 여흥의 기회를 끝없이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변화, 다양함에 대한 굶주림은 근래의 현상이 아니다. 17세기의 철학자이며 과학자인 블레즈 파스칼은 이미 이 문제에 관해 날카로운 분석을 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때때로 사람들의 다양한 행위에 대하여 생각해 볼 때, 불행을 일으키는 유일한 이유는 그가 방에서 조용하게 있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본다.”

 

개인적인 경험으로부터 파스칼은 시간을 보내는 세상의 방법들이 지닌 한계를 알게 되었다. 그는 이렇게 간파한다, “세상의 방법들이 실제로 행복을 가져다주어서도 아니고, 사람들이 참다운 행복이란 도박에서 이길 돈을 갖거나 사냥해서 잡힌 토끼를 가지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도 아니다. 아무도 행복을 그냥 선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우리의 불행한 조건에 대하여, 전쟁의 위험이나 생계의 부담에 대하여 생각하게 해 주는 단순하고도 평화스러운 삶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빼앗고 방향을 바꾸게 하는 선동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포획물보다 사냥을 더 좋아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사람들이 세상의 방법들에 끌리는 것은 그것이 행복을 가져다주기보다 우리의 불행으로부터 다른 곳으로 주의를 돌리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상의 방법들은 적어도 일시적으로나마 불행을 앞질러 막아준다. 파스칼에 의하면, 그러한 산만스러움은 재물과 권력에 집착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파스칼은 이렇게 외친다, “인간의 마음이란 얼마나 공허하고 비열한가!”

 

그러나 그는 언짢은 염세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자연의 실체, 특히 수학의 원리로 드러나는 자연의 모습에 끊임없이 호기심을 보였다. 천재 신동으로 그는 기하학에 관한 책을 썼다. 스무 살이 되기 전에 계산기를 발명했다. 이밖에도 진공의 존재를 증명하고, 공기의 무게를 정하며, 파리의 공공교통체제를 처음으로 고안하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파리시는 그를 지하철의 은인으로 존경한다.

 

그러나 어떤 시점에서 파스칼의 실제에 관한 이해는 극적으로 확대된다. 그는 그 날짜를 ­1654년 11월 23일, “밤 10시 30분경부터 12시 30분 경”까지 라고­ 정확하게 적어 놓았다. 그 때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과 깊고도 신비스러운 만남을 경험했다. 그는 이때의 감동을 한 양피지 조각에 적었고 그것을 윗저고리 안쪽에 꿰매었으며, 죽는 날까지 간직하였다. 그는 8년 후 서른아홉 살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증언에는 다음과 같은 말들이 있었다, “확실함, 확실함,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온 기쁨, 평화, 예수그리스도의 하느님... 기쁨, 기쁨, 기쁨, 기쁨의 눈물.”

 

파스칼은 이 체험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체험 이후로 그의 탁월한 능력을 원추와 미적분보다 신앙의 문제에 집중시켰다. 특히 그는 그리스도교를 열렬히 옹호하는 글을 쓰고, 당대의 회의적인 지식인들에게 도전했다. 그러나 그의 신앙에 관한 글, 역설적이게도 사후 1662년에 발간된 미완성의 글 「팡세」로, 파스칼은 가장 잘 알려지게 되었다.

 

원래 파스칼의 계획은 전통적인 의미에서 그리스도교를 옹호하기보다 자신의 개인적인 체험에 대한 증언과 인간마음의 신비에 대해 쓰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계획을 세웠다. “1부: 하느님 없는 인간의 비참함, 2부: 하느님과 함께 하는 인간의 행복”

 

하느님 없는 인간의 비참함? 파스칼이 마음에 두었던 청중은 예의바른 불가지론자들이었다. 그들은 과학에 열중하고 가장 최근의 지적인 유행을 선도하고 책들을 끼고 있으며, 또한 도박, 운동, 취미 등으로 쾌락을 즐겼던 사람들로서 자신들을 지상에서 비참한 사람들 측에 넣지 않는다. 그러나 파스칼은 이러한 상태를 논쟁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권태로움, 변덕, 불안”이 인간조건의 번지르르한 측면을 요약해 줄 수 있는 말이었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파스칼은 기분전환 꺼리를 허기진 듯 갈구하는 인간의 모습을 표현한다:


우리는 절대로 현재에 머무르지 않는다. 우리는 과거를 회상한다. 우리는 마치도 미래가 너무 천천히 온다고 하면서 그것을 서둘러 오게 하려는 것처럼 미래를 기대한다. 혹은 마치 과거가 너무 빨리 날아간다고 생각하며 과거를 기억한다... 우리 각자의 생각을 살펴보자. 그러면 과거나 미래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우리는 결코 현재에 대하여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생각한다고 해도 현재가 우리의 미래계획에 어떤 도움을 준다고 할 때에만 바라볼 뿐이다. 현재는 결코 우리의 목적이 되지 못한다. 과거와 현재는 그저 우리의 수단일 따름이고, 미래만이 우리의 목표가 된다. 이처럼 우리는 결코 실제로 살아있지 못하고 살아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항상 행복해 지려고 계획하기 때문에 우리가 절대로 행복해 질 수 없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어거스틴처럼 파스칼도 인간존재가 행복에의 욕구와 그것을 찾을 줄 모르는 선천적인 혼동사이에서 찢겨진 존재라고 보았다. 우리의 비참함에 있어 가장 심각한 징후는 조용히 있을 수 없는, 현재에 존재할 수 없는 무능력이다. 대신 우리는 영원히 이것저것 우리를 산만하게 만드는 것들을 추구한다. “만일 사람이 행복하려면 성인들과 하느님처럼 덜 산만하게 되는 만큼 더 행복할 것이다.”

 

파스칼의 한탄을 알아보는 것은 쉬운 일이다. 오늘날 이러한 산만스러움과 기분전환의 꺼리들은 더 수가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17세기 불란서보다 더 복잡해지고 있다. 단추 하나만 누르면 산만함은 끝도 없이 펼쳐진다. 컴퓨터, 인터넷, CD, DVD, 가족오락체제 등, 이 모든 것들은 동시다발적으로 편재하고 있으며, 모두 고독과 침묵의 관점에 효과적으로 방어하고 있다. 그러나 침묵에 대하여 무엇이 그렇게 두려운가? 우리 방에 조용히 앉아있는 일이 왜 그렇게 어려운가?

 

아마도 우리를 걱정하게 하는 것은 침묵 그 자체보다, 오직 우리 자신과 함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밤에 홀로 미치지 않고 앉아 있는 것은 내적인 삶이 양성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독은 확실히 “지적인 삶”, 즉 학식을 배우는 역량과 같은 것이 아니다. 고독은 존재의 핵심에 머무는 문제이며, 사막의 교부들은 그 핵심을 마음, 혹은 영혼이라고 불렀다. 바쁜 상업문화에서는 그와 대조적으로 모든 것이 우리로 하여금 내적인 삶을 비켜나 표면에 살도록 부추기고, 소비, 기분전환, 최근의 화제 꺼리, 혹은 다음의 큰 전율을 재빨리 정함으로써 우리의 불안한 갈증을 만족시키도록 몰고 간다.

 

이처럼 파스칼의 “변덕, 권태, 불안”이란 표현이 우리시대의 문화를 그대로 반영한다. 이런 것들이 인간 삶의 총체라면 행복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헛수고이다. 그러나 파스칼의 구도에서는 비참함이 마지막 말이 아니다. 그는 인간존재의 비참함은 추방된 영장의 불행으로, 그에게 참다운 행복의 기억은 공허한 그림자처럼 맴돌며 어슬렁거릴 뿐이라고 한다. 어거스틴처럼 파스칼도, “하느님 홀로 인간의 참된 선이다. 그리고 인간이 하느님을 버렸는데도 자연의 아무 것도 그 하느님의 자리를 대신 할 수 없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별, 하늘, 땅, 식물 등등… 참다운 선을 잃어버렸으므로 사람은 아무 것에서도, 심지어 자신의 파멸 속에서도 선을 찾을 수가 없다.”

 

그러나 빠져나갈 길은 있다. 파스칼에게 그리스도교의 매력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딜레마(창조와 추락에 관한 그리스도교 이야기에서 나타나는 위대함과 비참함의 혼합)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힘과 두 번째로, 문제의 해결책에 대한 신뢰도에 있다. 그는 우리의 무질서의 심연과 하느님 사랑의 깊은 심연을 동시에 보여주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참다운 본성, 우리의 진정한 집에 돌아갈 길을 찾을 수 있다고 믿었다. 우주는 더 이상 우리가 필사적으로 탈출구를 찾고 있는 차갑고 무심한 방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이 신비에 머물면서 우리는 두려움 없이 우리의 방에 앉아있을 수 있으며, 우리가 결코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성인들과 함께 참으로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홀로 있기 위한 더 나은 길


최근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선불교 등 동방의 종교적 실천방법에서 영감을 받고 있으며, 그것이 각자의 신앙과 아무런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사실도 깨닫는다. 선불교의 특징은 조용하게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훈련이 매우 요구된다. 선수행자들은 미동도 하지 않고 앉아서 그들의 호흡에 주의하며, 마음의 집중을 지향한다. 마음의 집중이란 현재에 충만하게 살아있는 깨우침, 자각을 뜻한다.

 

고대 불교경전인 “홀로 있기 위한 더 나은 길을 익히기”는 붇다와 테라라는 스님사이의 만남을 그리고 있다. 테라로부터 삶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붓다님은 그에게 “홀로 있는 더 나은 길”을 가르친다. 그것은 “과거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미래가 아직 오지 않았으며, 욕망으로부터 자유롭게 현재의 순간에 편안히 머무는 길이다. 사람이 이렇게 살아갈 때, 더 이상 마음속에 주저함이 없다. 사람은 모든 불안과 초조, 회한을 버리며, 모든 욕망의 굴레를 놓아버리고, 그를 자유롭지 못하게 방해하는 족쇄들을 끊어버리게 된다.”

 

이 경전의 의미는 단순히 다른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있는 것은 아무 의미나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특히 우리가 홀로 있어도 갈등을 일으키는 생각들과 욕구들에 의해 동요할 때는 더욱 그렇다. 신체적으로 조용하게 앉아있는 행위가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오려면, 그에 상응하는 내적인 고요함이나 정적이 함께 있어야 한다.

 

초기 사막의 은수자들도 이와 똑같은 주제를 다루었다. 평화와 고요를 찾아 사막으로 갔던 사람들은 그곳에서 “악마들”의 군대로부터 창피를 당했을 뿐이다. 모든 분노, 참지 못함, 그리고 질투, 시기가 세상에서 피해간 그들을 동행했다. 동방종교와 만나기 훨씬 전에 이 그리스도교의 영적 탐구자들은 그들 자신의 “홀로 있기 위한 더 나은 길”을 고안했다. 사막의 교부들은 거룩한 성구나 예수의 이름을 되풀이 하면서 마음을 집중한 기도의 실천을 개발했다. 이러한 실천은 내적인 기도와 하느님 안의 휴식을 구하는 영적인 훈련으로서 “정적, 침잠”을 목적으로 삼았다.

 

침잠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항상 기도하라”는 바오로의 권고를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항상 기도하라”는 문자 그대로 번역하자면, “와서 쉬어라”는 의미였다. 예수의 이름이나 예수 기도를 (“주 예수 그리스도님,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이시여, 죄인인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끊임없이 되풀이하고, 때때로 호흡의 리듬과 맞추기도 하면서 수도승들은 영적인 실제에 최고로 집중하는 상태에 들어갔다. 그러한 상태에 이르면, 성령께서 그들을 통하여 기도하고 있다고 말하곤 했다. 아토산의 그리스 수도승인 그레고리오 팔라마스 성인(1359년 사망)은 이 방법의 가장 유명한 대가인데, 그리스도인은 이 기도를 통하여 거룩한 본성을 붙들게 되고, 바위 위에 마음대로 움직이는 로프처럼 자유롭게 세상적인 집착으로부터 해방되어 하느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된다.

 

이러한 침잠(정적)의 영성에 관한 주요자료들이 수세기 동안 수집되어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발간되었다. 이 책의 현대판에 의하면 그것은 “깨우침에 이르는 길을 보여주고, 주의와 의식을 개발하는 것이며, 거룩함의 표지인 마음집중의 상태를 취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1700년대에 그리스어로 처음 출판되었고, 다음세기 초에 슬라브어로 된 책이 모스코바에서 나왔다. 이 책은 러시아의 현대 영성 고전서 중의 하나인 「순례자의 길」에 영감을 주었다.

 

「순례자의 길」은 1884년 모스코바에서 처음으로 출판되었는데, 19세기 중반에 러시아 전역과 시베리아를 걸어서 횡단하는 환상적인 여정을 수행했던 익명의 농민 출신 순례자의 체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을 한 거룩한 수도승으로부터 소개받았다. 그는 수도승에게 바오로사도가 끊임없는 기도라고 말한 것의 설명을 요청하였다. 수도승은 그에게 하루 3천 번씩 예수 기도를 되풀이하는 것으로 시작해 보라고 제안했다. 처음에는 꽤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수 주간이 지난 후 순례자는 6천 번씩 하게 되고, 이어 하루에 만 이천 번씩 하게 되었다. 그는 이렇게 썼다, “나의 온 갈망은 한가지에만 집중되었다. 예수의 기도를 하는 것이었다. 기도를 계속하자마자 나는 기쁨과 해방으로 가득 찼다. 마치 나의 입술과 혀가 나로부터 어떤 자극도 받지 않고, 전적으로 그것들 스스로 기도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하루를 큰 만족 속에서 지낸다... 마치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것 같다.”

 

기도는 그가 일상생활을 하는 동안 한결같은 친구가 되었고, 그는 고독의 길을 계속해 갔다. 점차 그는 기도가 그의 입술에서 마음으로 옮겨가는 것을 느꼈다. 이 시점에서 그는 더 이상 말을 되풀이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이제 기도는 그의 호흡, 그리고 그의 가슴의 박동과 일치되었다.

 

삶의 가난과 시련에도 불구하고, 순례자는 그의 끊임없는 “마음의 기도”를 통해서 세상을 영광의 빛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그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느꼈을 뿐만 아니라, “바깥세계 전체도 매력과 즐거움이 넘치게 보였다. 모든 것이 나를 사랑으로 이끌어 하느님, 사람들, 식물들, 동물들에게 감사했다. 나는 그들 모두를 마치 피붙이처럼 보게 되었고, 그들 모두에게서 하느님의 이름이 지닌 마술적인 힘을 발견했다.”

 

예수 기도를 되풀이하면서 얻게 되는 내적인 침묵은 세상과 그 움직임으로부터 물러서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세상이 더 투명하게 보인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간에 모든 것은 그에게 하느님을 말해준다. 모든 얼굴은 그에게 그리스도의 모습을 반영해 준다. 결과는 커다란 행복이고, 그는 열정을 다해 만나는 모든 사람과 그 행복을 나눈다.



현재의 순간


선의 대가인 베트남의 스님 티크 나트 한은 행복과 현재순간에 현존하는 것 사이의 관계를 주시한다. “현재로 돌아가는 것은 생명과 만나는 일이다. 생명은 오직 현재의 순간에서 발견될 수 있다. 왜냐하면 과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처됨, 해방, 깨달음, 평화, 기쁨, 그리고 행복은 오직 현재의 순간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 생명과의 해후는 현재의 순간에 일어난다. 우리의 약속의 장소는 바로 지금 이 자리에 있다.”

 

많은 사람들은 현재의 순간에 대한 불교의 강조가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는 그리스도교의 희망과 대조를 이룬다고 생각한다. 불란서의 실존주의 작가 알베르 까뮈 같은 사람들은 그리스도교가 “내세의 삶”에 대한 선입견으로 현재에 대한 우리의 윤리적 참여 능력을 약화시킨다고 비난하였다. 의심할 바 없이, 거룩함을 추구하면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 비난을 받아 마땅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위대한 성인들과 영적인 대가들 중에 다른 접근 방식을 취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영원한 삶에 대한 희망을 가졌으나, 현재를 무시하는 것과 달리 매순간에 결정적인 중요성을 느끼며 투신한다.

 

그런 사람들 중에 18세기 불란서의 예수회 회원이었던 쟝-피에르 드 꼬사드가 있다. 그의 명성은 1751년 그가 죽은 후 100년 만에 발간된 책 「거룩한 섭리에의 의탁」에서 왔다. 로렌조 수사의 회상록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실천」을 성찰하면서 꼬사드는 매일의 과제와 의무를 수행하는 가운데에서 거룩함에 이르는 길을 요약했다. 꼬사드에 의하면 모든 매순간은 하느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순간이므로 하느님의 뜻을 알려주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피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고, 사랑과 양보로 우리에게 혐오와 권태를 일으키는 것을 견딜 때” 우리는 거룩함의 길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현재의 순간”이란 말은 꼬사드의 저서에서 중심이다. 심지어 “현재 순간의 성사”라고 까지 말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그는 주장한다. 성찬례 안에서 빵의 형상아래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의 눈으로 알아볼 수 있는 것처럼, 충실한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느님의 뜻이 비록 숨겨져 있지만 참으로 현존하고 있음이 분명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성찬례는 그냥 평범하고 일상적인 예식에 불과할 것이다.

 

한편으로 꼬사드의 영성은 노동과 다른 행위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측면에서 그의 영성은 우리를 침잠과 깨어있음으로 초대한다. 꼬사드는 우리가 삶의 매순간을 하느님의 뜻이 그 뒤에서 우리의 식별을 기다리고 있는 어떤 베일이나 그림자로 생각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이러한 의식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우리 실존의 거룩한 심연에 깨어 있는 것이다. 현재의 순간에 하느님이 보내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것이 바로 너무나 작아서 사람들이 거의 알아보지 못하거나, 추수하지 못하는 겨자씨이다. 찾기엔 너무나 잘 숨겨져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이 보물을 찾는 비결은 무엇인가? 그런 것은 없다. 이 보물은 어느 곳에나 있다. 보물은 언제나, 어느 곳에서나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다.

 

삶은 불가피하게 지루한 상황들을 우리 앞에 펼쳐놓는다. 교통 혼잡 때문에 정지되어 있다던가, 줄을 서서 기다린다든가 등등. 그러나 이런 일들이 우리의 영적인 실천을 중단시키거나, 산만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하느님의 뜻은 편안하고 기쁠 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지루한 순간 속에도 있으며, 우리를 더 큰 인내와 겸손, 연민으로 이끌고 있는지 모른다.

 

상황과 그 적절한 응답이 어떻든지 간에, 꼬사드는 거룩함의 길이 하느님의 뜻에 대한 주의와 복종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행복에 이르는 길이다. 우리 삶에서 보이는 모든 혼란과 무질서에도 불구하고 그런 정신으로 살려고 노력할 때에 “우리는 거룩한 지혜의 모든 사랑스러움과 완전함을 보게 될 것이다. 신앙은 지상을 낙원으로 바꾼다. 신앙에 의하여 우리의 마음은 천국에 가까이 있다는 즐거움으로 고양된다. 모든 순간은 우리에게 하느님을 드러내준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바로 신앙의 의미라고 꼬사드는 주장한다. 신앙은 “장막을 옆으로 치우고, 우리가 영원한 진리를 볼 수 있게 해준다.” 만일 우리가 그런 빛으로 살지 못한다면 “행복도, 거룩함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신심행위를 열심히 수행한다고 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정주 


서구의 수도 전통은 나름대로 고요에 접근하는 방법을 지녀왔다. 그것은 말 그대로 신체를 움직이지 않는 것보다, 뿌리에 닿아있다는 의미를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이었다. 가난, 정결, 순명의 서원에 더하여 베네딕또 성인은 정주, 결단의 서원을 더 첨가했는데, 원칙적으로 자신의 본래 수도원에 그대로 남는 것을 의미한다. 베네딕또는 이 수도원에서 저 수도원으로 쉬지 않고 돌아다니는 소위 “순회수도승”들을 꾸짖으면서 그들이 절대로 결단을 하지 않으며, “그들 자신의 뜻과 취향에 노예가 되고 있다”고 비난한다. 그러한 결단이 없다면, 상황이 악화되거나 지루할 때 더 마음에 맞는 초원을 찾아 나서는 유혹에 걸려 넘어진다는 것이다.

 

결단을 싫어하는 모습은 비단 순회수도승들에게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결혼에 대한 결단을 끝없이 연기하기도 한다. 그들은 배우자를 결정하는 것이 다른 선택들을 미리 막아버리게 될까봐 두려워한다. 만일 오늘 발견하는 이 사람과 결혼한다면, 내일 혹은 내년에 더 어울리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어쩔까? 한편 결혼을 결정하면서도 정신적으로는 항상 다른 선택의 문을 열어놓고 결단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다가 상황이 어려워지면 도피구를 찾기가 더 쉬워지기 때문이다.

 

인간본성의 불완전함을 볼 때, 실제에 있어 “완전한 배우자”나 “완전한 공동체”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어떤 곳에, 저 밖의 어느 곳에 우리를 위한 더 나은 선택이 기다리고 있다는 불안에 사로잡히게 되면 우리는 진짜로 행복하지 못할 것이다. 삶의 바닥에 닿아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미끄러지듯 도망치며 살게 될 때, 우리는 인간존재로서의 충만함을 얻지 못할 것이다. 끝없이 무지개 너머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행복에만 몰두할 때에 우리는 앞에 다가온 행복을 잊기 쉬울 것이다. 파스칼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항상 미래에 대해 행복을 꿈꾸고 있으므로 우리가 실제로 살고 있는 순간인 현재에 결코 행복할 수가 없게 된다.

 

사막의 수도승들은 이렇게 쉴 수 없는 음울함을 나태, 무감각이라고 불렀다. 지금 우리는 그런 모습을 고요하게 있을 수 없는 무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떤 사막의 교부는 이 나태함에 대하여 이렇게 관찰한다, “나태함이 행복하지 않은 마음을 사로잡으면, 자기가 살고 있는 자리를 혐오하게 되고, 방에 머물러 있기가 지루해지며, 함께 사는 형제들을 비난하고 불평을 늘어놓는다... 우리는 다른 곳에 멀리 떨어져 있는 수도원들을 칭송하고, 그들이 수도생활의 진전에 더 도움이 되고, 영혼의 건강에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토마스 머튼은 이 “한낮의 악마”에 사로잡혀 고통을 겪었다고 일기에 분명히 밝히고 있다.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들어가 그곳이 “아메리카의 중심”이며 행복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고 했던 그가 후에 쓴 일기에서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수도원의 일상적인 운영에 화가 나고, 장상과의 갈등, 고독한 기도의 생활에 대한 자신의 염원을 질식시킬 것 같은 종교적 체제에 대한 두려움 등.

 

그래서 그는 더 “순수한” 수도회로 가야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고, 로마에 청원하여 더 적막한 곳에 암자나 새로운 수도공동체 설립까지 꿈꾼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장상들에 의해 무산된다. 그 후 머튼은 자기가 살고 있는 거세마니 수도원 내의 작은 암자에서 살 수 있는 허락을 받고, 기도와 글쓰기에 더 좋은 조건 속에서 지내게 된다. 마침내 더 포용적인 장상의 허락으로 그는 수도원 바깥으로 여행할 수 있게 되고, 결국 1968년 방콕의 회의에 참석 중 전기사고로 죽는다. 그때쯤 머튼은 자신의 성소와 정주서원에 관하여 평화를 되찾고 있었다. 겟세마니는 결국 그의 집이며, 거룩함을 추구하는 영역이었다. 그는 그곳이 그의 구원을 위한 자리였음을 확신하게 된다.

 

물론 정주서원은 베네딕도가 간략하게 표현한 것처럼 “태도의 변화”, 즉 성장과 영적인 성숙의 지속적인 과정이 일어날 때에만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자신과 주위의 모든 사람들을 비참하게 만드는 일이나 관계를 일생 끌어간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없다. 수도원의 정주는 수도 회원들이 서로와 하느님께 대한 책임을 나누는 것이다. 수도회 회원들이 각자의 깊숙한 마음을 깨닫거나 영혼의 성소와 삶의 상황을 깊게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에, 즉 보다 깊은 것을 추구하려는 결단과 합쳐질 때에 정주는 의미가 있고 영적인 가치를 갖게 된다.

 

사막의 교부들은 수도생활의 리듬과 절기에 관하여 탁월한 전문가들이었다. 그들은 위안에 대한 경험이 달의 변화만큼이나 다양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결과 수도승들은 그들이 마음의 동요라고 부르는 현상에 대해 연민을 가졌다. 그들이 고안한 처방은 노동이며, 계속적인 기도나 쇄신된 훈련이었다. 에바그리우스 수도승은 특히 예리한 방법을 제시한다: “나태함의 악마와 만나게 될 때, 우리는 눈물을 머금고 우리의 영혼을 두 갈래로 갈라놓아야 한다. 한 부분은 격려해야 할 부분이고, 또 다른 부분은 격려 받아야 할 부분이다.”



여린 소리


성인이란 하느님의 거룩함에 대해 맛을 들인 사람이다. 그의 마음은 사랑의 리듬에 조율되어 있다. 일상생활의 소음과 동요 가운데에서 그 리듬을 듣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듣기 위해서는 어떤 장소와 침묵, 그리고 시간이 요구된다.

 

많은 성인들은 우리들 대부분처럼 마감과 책임감 때문에 소진되어 그런 특정한 장소를 찾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그들은 나름의 “내적인 성”을 만들었다. 시에나의 가타리나(중세 이태리의 신비가이며, 예언자였던)는 수도원에 들어가는 것을 반대한 가족을 두고 이런 방법을 썼다. 아버지가 그를 집안에 가두고 하인처럼 부렸을 때, 가타리나는 “마음속에 작은 기도방”을 짓고, 일을 하는 가운데에서도 그곳으로 들어가 침묵의 기도를 했다. 바깥에서 보면 바쁜 집안일에 정신이 없었지만, 그러는 동안 그의 참다운 삶은 자신의 비밀 방에서 피난처를 구한다. 이렇게 하여 일상의 과제와 의무들을 천국에 이르는 사다리로 변화시켰다고 가타리나는 후에 말하고 있다.

 

성서에 나오는 가장 신비한 이야기들 중의 하나인 열왕기Ⅰ서 19,11-12를 보면, 예언자 엘리야가 그의 목숨을 빼앗으려는 사람들에게서 도망치며 동굴에 숨어 주님으로부터 말씀을 기다린다. “크고 강한 바람 한줄기가 일어 산을 흔들고, 야훼 앞에 있는 바위를 산산조각 내었다. 그러나 야훼께서는 바람 가운데 계시지 않았다.” 이어 지진이 일어났으나, 또한 큰불이 일어났으나, 야훼는 거기에 계시지 않았다. 그러나 불길이 지나간 다음 엘리야는 “한 조용하고 여린 소리”를 듣는다.

 

하느님의 소리가 지진도, 큰불도, 혹은 강한 바람 속에도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분별이 필요하다. 그러나 작고 조용한 소리 속에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는 분별 그 이상의 것이 요구된다. 즉 작은 침묵이 필요한 것이다.

 

보통 우리는 우리자신을 이 침묵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세상에 의지한다. 무엇보다도 세상의 소음과 수많은 기분전환의 기회들은 우리 안의 내적인 공간에 있는 두려운 침묵을 피하도록 도와준다. 그러나 그런 기회들을 붙잡으면서 우리는 값을 치른다. 끝없는 변화, 권태, 불안의 대가를 지불해야한다. 그것과 대조적으로 성인들의 행복은 어느 정도의 내향성을 제안한다. 그것은 단순하게 말해 내적인 삶을 추구하는 역량이다. 표면에 빠져 살면서 어떻게 내적인 삶을 만들 수 있을까?

 

기도의 위대한 스승들은 영적인 삶을 대양에 비교했다. 표면의 삶은 바람과 파도가 심하다. 그러나 표면 아래에는 아무리 폭풍이 몰아쳐도 고요한 물이 있을 뿐이다. 행복의 추구는 이 깊은 심연에 닻을 내리는 것이다.



 

출처 : 윤경재
글쓴이 : 화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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