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행복으로 이끄는 성인들

아시시의 성 프란시스코 3.

샘물 퐁퐁 2010. 7. 19. 14:59

 

 

 

 

                                                           

 

 

그리스도와 가까운 삶 살기 위해 노력
주님 형성하신 가치 깨닫고 전환점 맞아
자신을 한없이 낮추며 하느님께 순명

 

성 프란치스코는 1182년에 태어나 1226년에 선종했다. 칭기즈칸이 중국을 통일하고, 천하를 호령하던 그 시기다.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그는 44년을 살았다. 짧은 삶이다. 청년이 될 때까지는 하느님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그가 하느님과 일치해서 산 기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프란치스코가 진정한 신앙의 모델로 변모 될 수 있었을까.

어린 시절의 프란치스코는 방탕한 삶을 살았다. 풍요로움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꿈꾸는 것이지만 때로는 삶의 독이 되기도 한다. 그는 부자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훌륭한 교육을 받을 수 있었으며, 물질적으로도 풍족하게 지냈다. 불편을 몰랐던 성장기다. 돈도 쓰고 싶은대로 맘껏 썼다. 마음대로 살았던 것이다. 사람은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으면 진정한 높은 가치를 보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하느님은 인간을 당신이 마련하신 방법으로 형성되도록 창조하셨는데, 풍족하면 이러한 하느님의 형성의 섭리를 실현시키기 힘들다. 그렇게 프린치스코는 20세가 될 때까지 반형성적인 삶을 살았다.

그러다가 삶의 전환기가 오게 된다. 이제 드디어 형성적 삶을 살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는 것이다. 전쟁터에 가서 포로가 됐다가 어렵게 풀려났고, 나중에는 큰 병도 얻었다. 형성하는 신적 신비의 섭리는 이렇게 오묘하다. 공부도 많이 시켜주고,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해 주었고, 감옥에서도 빼내어 주었는데 프란치스코는 그 때까지 하느님의 형성시키는 섭리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에는 큰 병을 통해 조금씩 신비스러운 어떤 힘의 가치를 깨닫게 된다. 병을 앓는 것도 어떤 때는 큰 은총이다. 고통을 통해 그동안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에게는 특별히 그렇다. 그 결과 프란치스코는 하느님께서 프란치스코에게 미리 형성시켜 놓으신 그 형성을 하나 둘 재형성하고 초형성하는 노력을 통해 완성해 나가게 된다.

하느님을 느끼면 사람은 변화되기 마련이다. 지금까지 방법과는 조금 다르게 돈을 쓰기 시작한다. 예전처럼 흥청망청 쓰지 않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 쓴다. 그리고 성당을 보수하기 위해 거액을 기부하기도 했다. 그런데 정작 이 돈은 자신의 돈이 아니라 아버지의 돈이었다. 아버지는 불같이 화를 냈다. 심지어 다락방에 가두기도 했다. 이때 프란치스코가 보인 반응이 놀랍다. 은총이 아니라면 이런 행동을 할 수 없다. 은총도 보통 은총이 아니다. 옷을 다 벗는다. 그리고 아버지 앞에 내놓고 “아버님 가져가세요”한다. 그리고 집을 나왔다. 이제부터 프란치스코는 온전히 하느님만 바라보는 삶을 살게 된다.

아름다운 삶은 아름다움을 퍼트리고, 자연스레 사람들이 따르게 된다. 그렇게 수도회가 설립됐다. 훗날에는 병중에서도 오상을 받고 그리스도와 아주 가까운 삶을 살았다. 진정 그의 모습은 그리스도의 모상으로서의 삶이었다.

이러한 프란치스코 성인의 삶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첫 번째 마음의 보화는 우선 ‘단순함 의성향이다. 우리는 참으로 복잡하게 산다. 욕심 때문이다. 단순하게 사는 사람은 욕심을 내지 않는다. 사물을 소유하려 하지 않는다. 세상 모든 사물이 하늘에 계신 하느님의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마음이 가난하면 영적으로 충만해진다. 내가 세상의 것을 소유하려 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모두 내 것이 된다. 하나를 버려서 세상 모든 것을 얻는다.

두 번째로 발견할 수 있는 마음의 보화는 ‘순명’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순명이라고 하면, 부모님에 대한 순명, 수도회 장상에 대한 순명 등을 떠올린다. 물론 이런 순명도 순명이다. 하지만 낮은 단계의 순명이다. 진정한 순명은 매 순간 하느님의 뜻에 따르는 삶을 말한다. 이런 차원에서 순명은 무조건 윗사람에게 “예”하는 것이 아니다. 부모라고 해서 늘 옳은 것은 아니다. 물론 자녀보다는 부모의 뜻이 90% 정도 옳을 수 있다. 수도회 장상의 뜻이 90% 더 옳을 수 있다. 하지만 하느님의 뜻은 얼마든지 다른 차원에서 실현될 수 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불순명으로 보이는 것까지 포괄하는 것이 바로 진정한 높은 단계의 순명이다. 프란치스코는 이 완벽한 순명의 삶을 살았다. 하느님께 순명한다는 것은 자신을 한없이 낮추는 것이다. 나는 프란치스코를 통해 참으로 높은 경지의 순명을 본다. 그는 자신을 낳아준 아버지에게는 불순명했지만,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는 온전히 순명했다.


정영식 신부 (수원 영통성령본당 주임)
최인자 (엘리사벳·선교사)
http://blog.daum.net/duaworld/157141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