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행복으로 이끄는 성인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2.

샘물 퐁퐁 2010. 7. 19. 14:56

 

 

                                                                        

 

 

주님을 따르기 위해 청빈·보속의 삶 살아
교회에 순명하며 깊은 신앙으로 신자들 이끌어
갈수록 많은 수도자들 동참… 수도원 날로 성장

 

 

신선한 충격이었다. 프란치스코의 청빈 선언은 새로운 반향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는 교회와 민중들에게는 하느님을 따르는 새로운 모범을 보였다. 그러자 세 명이 프란치스코의 삶에 동참하겠다며 찾아왔다.

그 세 명 제자는 퀀타바레의 벨라노라는 상인, 순박한 성격의 에지디오, 법학자 카타니의 베드로 등이다. 이후 제자의 수가 차츰 늘어 열 둘에 이르게 됐다. 프란치스코는 자신이 하느님을 체험했다고 해서, 교회를 벗어나 개인적으로 하느님을 따르지 않았다. 철저히 교회에 순명했다. 교회 전통 안에서 살아 숨 쉬는 하느님의 섭리에 깊은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프란치스코에게 몰려들면서 수도원 설립의 필요성이 생겼다. 그래서 그는 로마로 가서 수도회에 대한 교황의 인가를 청원했다.

교회는 신중했다. 특히 너무나도 엄격한 청빈 생활 때문에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그래서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프란치스코의 요청을 받고 한동안 망설였다. 과연 하느님에 의한 일인지 아닌지 분간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날 밤 교황은 꿈을 꾼다. 꿈에서 프란치스코는 쓰러져가는 교회를 떠받치고 있었다. 잠에서 깨어난 교황은 즉시 프란치스코가 가지고 온 회칙을 인준, 수도회를 강복하고, 일반 신자들에게 강론할 사명도 그들에게 맡겼다.

이제 프란치스코가 꿈꾸던 공동생활의 기틀이 마련됐다. 베네딕토회로 부터 받은 아시시 근처에 있는 포르찌웅콜라라 불리는 소성당과 그에 부속된 약간의 토지도 얻었다. 프란치스코가‘작은 형제회’라고 명명한 새로운 수도원이 첫 걸음을 내딛는 순간이다.

영적인 힘이 있는 수도회는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성장하는 법이다. 수많은 수도자들이 프란치스코의 거룩한 뜻에 동참했고, 그에따라 분원도 계속해서 늘었다. 사람이 많아지면 잡음이 일어날 법 한데, 작은 형제회 회원들은 어디에서나 청빈하고 거룩한 생활 태도로 많은 이의 공경을 받았다.

이러한 영향은 여성들에게도 파급된다. 클라라라는 명문가 출신인 한 처녀가 프란치스코의 설교에 깊이 감동받고, 청빈과 보속의 생활을 하겠다며 찾아왔다. 모두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었다. 프란치스코는 보수공사를 마친 성 다미아노 성당 곁에 한 채의 집을 클라라에게 주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여성들도 프란치스코의 삶을 따르겠다며 몰려들기 시작했다. 얼마 후 그녀의 동생 아녜스도 언니의 뒤를 따랐다. 사람이 늘어나면서 여자 수도회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됐고, 클라라가 초대 수도원장으로 취임했다. 그런데, 수도자들처럼 모든 욕망을 끊고 오직 하느님만을 따르는 사람 이 외에도, 일상을 살아가면서 각자의 자리에서 프란치스코의 영성을 실천하고자 하는 이들도 많았다. 프란치스코는 이들을 위해 제 3회를 창립했다. 이들 중에는 귀족, 서민, 농민 등 빈부귀천이 없었다.

그러던 와중에 프란치스코는 자주 병을 앓았다. 수많은 설교와 자청한 고난 등이 문제였다. 프란치스코는 주님이 하신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따라 하려고 노력했던 분이다. 그래서 그는 주님께서 당하신 모든 수난과 절대 고독을 체험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이러한 엄격한 고행으로 인해 그의 몸은 나이 보다 더 빨리 쇠약해져 갔다. 하지만 그에게는 더 큰 고행이 기다리고 있었다.

1224년 어느 날, 그가 산에 올라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고 있을 때였다. 예수 친히 양손, 양발 옆구리에다 오상을 박아 주었다. 큰 은혜임은 틀림없었으나, 인간적 차원에서는 견디기 힘든 시련이었다. 참으로 큰 고통이었다. 그럼에도 프란치스코는 이러한 기적을 끝까지 숨기려 노력했다.

1226년 9월에 이르러 프란치스코는 자신에게 마지막 순간이 다가온다는 것을 알았다. 훗날 교회로부터 제2의 그리스도라고 불리기도 한 그는 사람들에게 “나를 맨바닥에 눕혀라”고 했다. 그리스도처럼 완전한 가난 가운데서 세상을 떠나고자 했기 때문이다. 성경 중 예수 수난에 대한 구절이 낭독됐다. 이후 프란치스코는 시편 142편을 읽었다.

“큰 소리로 나 주님께 부르짖네. 큰 소리로 나 주님께 간청하네. 그분 앞에 내 근심을 쏟아붓고 내 곤경을 그분 앞에 알리네 …주님, 당신께 부르짖으며 말씀드립니다. ‘주님은 저의 피신처 산 이들의 땅에서 저의 몫이십니다’….”

그리고 숨을 거두었다. 당시 성자의 나이는 44세였다.


정영식 신부(수원 영통성령본당 주임)
최인자 (엘리사벳·선교사)
http://blog.daum.net/duaworld/157141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