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행복으로 이끄는 성인들

맨발의 성자 이현필의 생애 3.

샘물 퐁퐁 2010. 3. 9. 15:38

 

                               

II 이현필(李鉉弼, :방림, 1913 - 1964)

 

일생을 절식하며 맨발 벗고 다니면서 예수의 복음을 전하였다금욕, 청빈, 순결을 몸소 실천한 선생은 동광원을 통해 수많은 제자를 길러내었다. 예수를 닮으려는 그의 열성은 철저하고 진실했다.

 

이현필(李鉉弼, 호적에는 李鉉鼎으로 되어 있음)선생은 1913 1 28일에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용하리(권동)에서 출생했다. 이곳은 나주군 영산포나 남평에서도 산을 타고 30여리 떨어진 산골짜기에 있으며 주변에 화학산과 천태산(혹 개천산)이 있다. 아버지 이승노(李承老), 어머니 김오산(金烏山) 사이에 3남매가 출생했는데, 현필은 어머니 나이 27세 때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 형과 누나가 있다. 막내로 자라서 일곱 살까지 어머니 젖을 먹고 자랐다고 한다. 꼿꼿한 성격은 부친을 닮았고, 인정이 많고 따뜻한 점은 효자댁 출신의 어머니를 닮았다. 효성이 지극했다고 한다. 열 살이 되기까지 권동집에서 자라면서 천태보통학교를 다녔다. 이 학교는 본래 서당이었던 것을 후에 학교로 승격한 것인데, 현필은 4년 동안 언제나 1등으로 공부하여 졸업했다. 그가 보통학교를 졸업한 것이 그의 전 학력이다. 그후 현필은 혼자서 독학하고 노력하여 많은 책을 읽고 사상이 깊어 그 실력이 대학교수와 논쟁할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청년이 되어 다도면 면서기(茶道面 面書記) 시험에 응시하여 형과 함께 합격했으나 형만 서기로 다니고(후에 다도면장까지 지냄) 이현필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서기로 봉직하는 일을 시작하지 않았다.

 

어릴 때 이름은 싹뿌리라 불렀는데 그 이유는 전해지지 않는다. 후에 제자들이 이를 ‘뿌리고 싹 났으니’ 혹은 ‘예수를 안 후는 싹 버렸다’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이선생은 자칭 ‘헌신짝’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뜻으로 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죄인이라는 뜻이다. 일생 남들이 자기를 존경하고 칭찬해주는 일은 그 마음속으로부터 싫어했다.

 

이현필의 집은 예수를 믿기 전에 넉넉히 살던 집안이었으나 부친의 사업 실패로 자기가 살던 집도 남에게 넘어갔다. 그 후 너무도 가난하게 살아 그는 돈을 벌어 고생하는 어머니의 소원을 풀어드리기 위해 옛집을 다시 사고 싶었다. 그래서 권동에 살면서 몇 십리 떨어진 영산포 읍에서 닭장사를 하러 다녔다. 당시 영산포에는 일본사람이 많이 살고 있었는데 일본인 교회가 하나 있었다. 담임목사는 관파라 불렀는데 그는 사람들에게 구제도 많이 하고 열심히 전도하던 분이었다. 이현필은 그를 만나 처음으로 예수의 복음을 듣고 그의 설교에 감화를 받아 예수를 믿기로 했다고 한다. 이때가 13세였을 때였다(1925). 그의 나이 17세 때 서울 기독 청년회관(YMCA)에서 영어와 성경을 공부했는데 이때에 원경선 선생과 서로 알게 되어 서로의 교제가 평생 계속되었다. 그의 나이 21세때(1933)에는 전남 광주 신안동교회 전도사로 시무하기도 했다. 이때 백춘성 장로와 알게 되었고, 백장로는 일생을 통하여 이현필을 도왔고, 동광원 사람들과 교제도 하였다.

 

이현필의 신앙생활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분은 예수를 믿고 방산(芳山)장로교회에 출석하면서 만난 등광리의 이공(李空, 이세종)선생이었다. 이곳은 용하리에서 10리 떨어진 중촌(中村)마을로 이공의 고향이다. 방산교회는 이 두 사람이 함께 신앙생활을 하던 교회로 지금은 등광리교회(1999년 초부터 현재 정칠영목사 시무)가 되었다. 그를 따라다니며 성경을 배울 때 부친은 아들을 보고 미치광이를 찾아다닌다고 꾸짖었어도 이현필은 그냥 계속 다녔다고 한다.

 

복음의 진리를 깨달은 후 1948 9 1일에 남원 지리산 골짜기 ‘서리내’에서 몇 사람을 모아 성경을 가르친 것이 최초 “한국 기독교 토착 신앙공동체”운동을 시작한 시발점이었다. 몇 달 후 서울의 Y총무인 현동완선생이 보내준 기금으로 정인세와 함께 광주에서 동광원(이현필은 歸一園이라 함)을 세워 고아원 운영에 적극 지원을 하였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고아들의 숫자는 순식간 600명으로 불어났다.

 

동광원은 한마디로 “한국 기독교 수도원”이었는데 순결(철저한 남녀유별), 노동, 수도, 선행, 정직, 성실, 책임, 희생의 정신을 실천해 나갔다. 효소법을 개량한 농사를 시작했고, 모든 공동체 멤버는 직접 노동을 하여 자급자족했으며, 최소한의 양만 먹고 최대한 남긴 농산물을 팔아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구제하는데 사용했다. 노동을 중요하게 여기며, 근검절약하고 사치를 피하고 현대문명을 거부하는 점에서는 재침례파(Anabaptist, 미국 오하이오주와 펜실베니아주를 비롯한 10여개 주에서 신앙공동체를 형성하고 살고 있음)인 아미쉬(Amish) 공동체와 통하는 점이 있다. 김용기장로의 가나안농군학교가 일종의 농촌계몽운동이라면, 동광원은 순수한 신앙운동이었다.

 

현재 동광원은 남원에 그 본부를 두고 있으며, 여러 곳에 분원이 있다. 화학산 기슭 도암의 ‘청소골짜기’(정규수 수녀, 1948 10, 고아원운동 발상지; 고아와 머슴출신 한영우집사는 1953년에 들어와 동광원 수녀들의 농사일을 돕고 있다), 중촌(中村)의 화순(625때 피신처, 김춘일 수녀가 1953년에 들어와 현재 ‘큰 언니’역할을 하고 있다), 도구밖골(도구봉) 가마터, 문바위, 이세종 선생의 유적지와 무덤, 각시바위, 소반바위, 바람재, 전남 함평, 진도, 경기도 벽제 계명산(수녀의 마을), 무등산 등지에 있다. 광주 동광원은 516직후 정부에 의해 폐쇄 조치되었다가 1965년에 다시 귀일원(초대 원장=정인세 19091991, 초대 총무 및 2대 원장=김은연 19201991)

이라는 이름으로 사업을 재개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선생은 주로 암굴에서 수도를 했고, 손수 움막을 지어 기거했으며, 깨끗한 동정(童貞)생활을 실천했다. 부인 황홍윤은 광주에서 목회하던 백영흠 목사의 처제인데 결혼 직후부터 이선생은 잠자리를 함께 하는 것을 거절했고, 거지와 고아들을 끌고 다니면서 집안살림을 돌보지 않자 한때는 ‘칼을 품속에 숨기고’ 다니며 살해할 기회를 노릴 정도로 남편을 미워하였다고 한다. 한 때 다른 집으로 개가하였지만 노년에 병이 들어 도장리로 돌아와 회개하고, 정월례집에서 3년간 기도하며 살다가 1998 83세로 소천하여 이세종 부인 ‘한골 어머니’의 묘 옆에 묻히었다

 

625동란 때 공산당이 광주로 진입하기 직전 피신하지 않고 남아 있던 수피아여학교 교장 유화례선교사를 화학산 문바위, 박적골, 도구박골 등지에서 정성껏 숨겨주었다. ‘인공치하’ 5개월 동안 100여 동광원 식구들과 함께 피신생활을 한 것이다. 이때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 동광원은 수도생활과 성경공부 지도하는 일 외에, 고아들, 폐결핵 환자들 돌보아 주며, 지체 장애인 300여 명 돌보고 있다. 그의 말년에 성경공부 모임이 절정을 이루었는데, 밤나무골 남나무 집에 백 여명의 제자들이 매양 선생의 말씀을 사모하여 모여들었다.

 

이현필선생은 건강이 좋지 않아 마침내 폐결핵에 걸려 고생하기도 했으며 자주 각혈을 했다. 죽음을 예상한 선생은 자기가 고요히 죽을 장소를 찾으러 서울로 향하는 기차를 탔다. 남녀 수십 명의 제자들이 광주역에서 눈물을 흘리며 환송을 하였다. 오북환, 김준호, 정인세가 동행했다. 서울 신촌 부근 넝마주이 거지굴에서 마지막 숨을 거둘 준비를 하면서 밤중에 곁에서 지켜보고 있는 제자인 정인세, 오북환에게 먼저 가라고 해서 이 두 분은 자리를 비웠고 김준호는 곁에 남아 있었다. 아마 선생은 옛날 광주 양림다리 밑에서 거지생활을 하던 시절을 회상하며 죽는 순간도 거지하고만 함께 있으려는 듯했다. 다음날 정인세는 다시 돌아왔다. 선생은 반가워하면서 김준호와 정인세 두 제자에게 마지막 신앙간증을 하였다.

 

“저는 이 시간까지 예수님을 섬김에 있어서 선행위주를 해왔습니다. 오늘 지금 저는 그 동안 잘못 믿어온 점을 자백합니다. 우리 예수님의 보혈만이 저를 구원한다는 것을 저는 미처 깨닫지 못했습니다. 저는 일평생 오늘까지 밥이 귀한 줄 알며, 밥만 좋은 줄 여기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지금 와서 제게는 물이 제일 귀합니다. 생명수가 귀합니다. 이 물을 마셔야 저는 살고, 이 물을 마시지 않는 날엔 저는 죽습니다. 선행으로는 구원 얻지 못합니다. 예수님 보혈로만 구원을 얻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예수님 보혈이 내 몸에 한 방울 흘러 들어오면 저는 삽니다. 제가 앞으로 걸어갈 걸음은 주의 보혈을 의지하는 신앙으로 뛰어 들어갈 것입니다” 선생의 요청대로 정인세가 이를 종이에 받아 적었다.

 

서울 신촌 대피호 굴속에서 사경을 방황하다가 문득 깨달아진 이 날의 경험이 있는 뒤부터는 이현필선생의 분위기는 보다 부드러워졌고 깊은 사랑의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일반 교계에서 이현필을 산중파 금욕주의자라고 불렀다. 그 말대로 지금까지 그는 고기를 입에 대지 않았으며 죽어도 약을 쓰지 않았다. 이공(李空)처럼 절대로 살생을 하지 않았다. 길을 걸어갈 때 보통 사람들보다는 배나 느리게 천천히 걸으면서 길가의 개미, 지렁이 등 곤충벌레가 밟히지 않게 목숨을 가진 것을 주워 옮겨 놓든가 피해서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일평생 그는 한잔의 커피도 한 점의 고기도 들지 않았다. 몸소 청빈하게 순결하게 살면서 예수를 닮으려고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그의 철저한 금욕생활 자체에 대한 교만을 가지지 않고 죽는 순간까지도 항상 부족한 죄인임을 고백한다. “제가 오늘 이대로 죽으면 저는 천국에서 예수 앞에 역적 같은 놈이 되리라는 느낌을 가집니다. 그 동안 제가 절대선행을 강조해 왔던 고로, 저를 따르는 이들을 온통 철저한 율법주의자들을 만들어 버렸습니다…나는 위선자입니다. 나도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여 구원 얻을 사람이지 선행이나 금욕고행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가 임종을 앞두고 깨달은 것은 예수 보혈로만 구원을 얻는 것이다. 물론 그의 과거의 신앙도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신앙이었다. 그런데 그의 제자들이 선생의 금욕생활 자체를 우상화하지 않을까 염려되어 이를 다시 강조한 것이다. 그의 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2천년 전 유대땅 골고다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만 가지고는 부족하다. 바로 지금 이 시간 어쩔 수 없는 나의 마음에 뚝뚝 떨어져 오는 예수님의 보혈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평생 고기를 한번 잎에 대지 않던 선생이 신촌에 있는 거지 굴에서 기진맥진해 있을 때 굴비 국물을 달라고 해서 떠 드릴 때 제자들이 당황했다. 물론 후두결핵으로 그 국물을 넘기지는 못했지만, 금욕주의보다 복음이 우선임을 몸으로 가르쳤던 것이다. 자체 자신이 죽고 나서 율법주의파나 고행을 위주로 하는 어떤 파가 생길까봐 몹시 염려한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그의 급성 결핵병이 어느 정도 치유가 되어 위험한 고비를 넘기게 되었다. 병이 좀 회복된 후 이때의 심경을 술회하면서 “내가 저지른 이 파계 사실이 세상에 알려져 모든 사람들이 듣게 된다면 그 동안 나의 금욕주의, 고행, 불살생 때문에 나를 존경하고 따르던 제자들이나 청년들 중에 크게 실망하여 소동이 일어나 격분하여 나를 위선자라 혹은 정신이 돌았다고 욕하고 혹은 나를 저버리고 떠날 것이고, 혹은 더 분하게 생각하는 이는 몽둥이로 나를 때리며 동광원에서 쫓아내기까지라도 할 것임을 각오하면서 고기를 먹은 것이라”고 말함으로 인간 이현필을 우상화하려던 당시 제자들의 움직임을 과감히 뿌리치고 오직 예수의 복음만이 남아야 함을 강조했다. 그렇게 예수를 닮으려고 애쓰던 이현필선생.

 

1963년에 광주로 내려와 최흥종목사의 주선으로 제중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다. 물론 혼자 입원하기를 거부하여 결핵병으로 고생하고 있는 제자 김준호와 함께 입원하게 되었다. 사실 병원에 간 것은 자신 때문이 아니라 김준호를 입원시키려는 생각이 더 많아서 그렇게 한 것이다. 후두결핵병이 걸린 것이다. 기침과 가래가 심하고 목이 아파서 말을 못했다. 한동안 병이 심해서 40일간이나 목으로 물도 삼키지 못했다. X-ray를 찍어보니 속립성 결핵인데 이 병은 결핵균이 혈관을 타고 전신으로 퍼지는 급성 전신결핵이었다. 결핵약이 나오기 전에는 속립성 결핵에 걸렸다 하면 모두 사망하고 마는 무서운 결핵이었다. 여성숙 의사를 비롯한 의료진들의 정성어린 치료로 회복이 빨라 열흘 후에는 겨우 목소리가 나오게 되었단다. 이리하여 3개월간 병원 음식도 비교적 들면서 치료를 받던 중 퇴원하겠다고 한다. 평소 약을 쓰지 않고, 고기나 생선도 먹지 않던 이선생이고 보면 3개월간 병원에 입원한 것도 길었다. 특히 치료에 효험이 되는 약을 주어도 먹지 않고 모았으며, 주사도 거절하여 여성숙 담당의사가 권유하였더니, ‘우리 한국의 결핵환자들이 이 약을 다 먹을 수 있게 되면 나도 먹겠습니다’고만 했다. 아직 병이 완치된 것이 아니었고 겨우 고비만 넘긴 상태인데 퇴원하고 말았다. 심지어 여의사가 주사기에 약을 담아서 왕진을 하여도 막무가내 거절하여 그냥 돌아왔다. 김준호는 6개월간 입원하여 건강이 많이 회복될 수 있었다.

 

예상대로 선생의 파계(고기도 먹고 약도 쓰다)로 많은 제자들이 떠나갔고, 심지어 그를 위선자라고 평하는 이들도 있었다. 물론 선생은 신촌에서 고기국물로 입 다신 것과 제중병원에서 한번 약을 쓴 일 외에는 다시 과거의 습관대로 고기도 약도 입에 대지 않았다. 병원에서 퇴원한 후 본격적으로 제중병원 전도를 시작하였다. 그후 계속 그는 독신생활을 강조했다. 경기도 벽제 계명산으로 임종하러 갈 때 행한 고별(유언) 설교도 끝까지 동정(童貞)을 지키는 순결주의만은 양보하지 않았다.

선생과 동광원의 순결주의는 참으로 엄격하고 철저하여 이들 나름대로 독특한 해석을 가지고 있다. “끝까지 동정을 지켜라. 깨끗이 살아라. 청빈 생활을 사랑하라. 음란은 죄다. 동정을 지키고 깨끗이 살아라”

 

1964년 정초 해마다 하는 대로 광주 방림에 있는 동광원에서 한 달 동안 연속하는 수양회를 인도할 때 건강상태가 극히 악화되었다. 한번 하는 강론시간이 적어도 두 세 시간씩 계속했는데도 시종 그냥 무릎을 꿇고 앉은 채로 하였다. 강의가 끝나면 무릎이 굳어져 일어서지 못하며 제자들이 양쪽에서 겨드랑이를 끼어 부축해 세웠고, 거실까지는 업어다 모셨다. 누우면 또 다시 송장 같았다. 한 달간의 수양회를 그렇게 인도하고 나서 자신의 임종이 가까웠을 때 평소 마음에 둔 경기도 벽제 계명산 분원에서 지냈다. 도착한지 엿새만에 세상을 떠났다. 임종의 자리는 계명산속, 동광원 분원에서 500미터나 더 산중으로 들어가 옛날 현동완 선생의 산장자리에서였다. 1964 3 16일 저녁, 선생은 혼수상태에서 영적인 대화를 하고 있던 것을 조정은 수녀가 들었다. “예, , 저는 죄인입니다…예…” 혼자의 독백이었다. 그리고 조금 후 “할렐루야, 할렐루야” 찬송을 불렀다. 그제서야 조정은 수녀는 따뜻한 물을 들고 방에 들어가서 ‘선생님 아까 새벽에 누가 왔습니까?’ 물으니 “주님께서 내일 새벽 3시에 오라고 하셨습니다.

 

다음날 산장의 새벽은 너무도 고요했다. 병든 이선생은 아랫목에 누워있고 왼편에는 계명산 수녀 원장인 김한나 수녀, 오른편에는 일생 잠시도 선생 곁을 떠나 본 일이 없는 김준호, 방구석에 김희옥 수녀, 조정은 수녀가 앉아 있다. 마지막 순간까지 두 수녀에게 정결을 지킬 것을 당부하며, 준비된 선생의 수의(壽衣)로 깨끗이 빨아둔 누더기 옷 바지저고리로 갈아 입혔으나 죽는 사람은 그런 옷이 필요 없다면서 도로 헌 옷을 입은 그대로 묻어 달라고 당부했다. ()도 쓰지 말고 자기는 죄인이니 거적대기에 싸서 내다 파묻으라고 유언을 남겼다. 무덤은 평토장(平土葬)으로 하라면서 죄인의 시체니까 아무도 모르게 하고 아무나 함부로 밟고 다니게 하라고 했다.

 

최후의 순간이 가까워 오면서 이선생은 기도하기를 “주님 저는 주님을 사랑하고파 무척 애썼습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고자 할 때마다 주님은 저를 피하셨습니다. 주님! 저는 지금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갑니다…. 오 기쁘다! 기쁘다! 오 기뻐! 오메 못참겠네. 아이고 기뻐! 이 기쁨을 종로 네거리에라도 나가서 전하고 싶어. 제가 먼저 갑니다. 다음에들 오시오!” 하고 눈을 감았다. 무릎을 꿇고 앉은 채로 얼굴은 하늘을 향하여 쳐다보면서 마지막 호흡을 내 쉬었다. 1964 3 17일 새벽 3시 정각이었다. 이리하여 만51세의 향년으로 별세하셨다. 이때 그의 외모는 80된 노인보다 더 연로해 보였다고 한다. 그의 무덤은 벽제 계명산에 있다.

  <출처, 웹사이트, 필자 미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