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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행복으로 이끄는 성인들

맨발의 성자 이현필의 생애 1.

 

 

맨발의 성자 이현필의 생애

 

“오 기쁘다! 기쁘다! 오 기뻐! 오매 못 참겠네. 아이고 기뻐!

숨이 가라앉는 듯 하다가도 다시 돌아올 때마다 “이이고 기뻐! 오 기쁘다. 못 참겠네.

이 기쁨을 종로 네거리에라도 나가서 전하고 싶다.”고 외쳤다.

환희의 물결이 터져 나온 것이다.

성령의 기쁨이.... 임종 수일 전부터 기쁨이 밀려와서 어쩔 줄 모르더니 이제 절정에 이른 것이다.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보던 제자들에게  “먼저 갑니다. 다들 다음에 오시오!” 하며 고요히 눈을 감았다.

무릎을 꿇고 앉은 채 얼굴은 하늘을 향해 바라보면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때는 1964 3 18일 새벽 3시였다.

53세로 생을 마감한 성인 이현필선생의 임종시의 모습이었다.

마치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님을 그린 성화의 모습이나 같았다고 한다.

 

 

발의 성자로 알려진 이현필은 1913년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권동리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3세 때 읍내에 있는 일본인 목사 관파(官波)에게 전도되어 복음을 접한 후, 1928년 광주농업실습학교 학생 때 강순명 목사를 통해 알게 된 도암의 ‘이세종’을 만나게 된다.

이현필은 남다르게 거룩한 삶을 동경하며 실천하려고 애썼기 때문에 그의 수제자가 되었고

이세종은 생전에 “내가 많은 사람과 이야기를 해봤지만 내말을 가장 빨리 이해하는 사람은 이현필 뿐이다”라고

하였다.

이세종과 달리 이현필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과 함께 수도공동체를 이루고 함께 동고동락하며 제자들을 훈련했다.

이현필 선생을 가장 초기부터 따랐던 분으로 당시 남원 읍내에서 목공소를 하고 있던 오북환 집사였다.

오북환집사는 이현필을 만나 그 감화력에 동화되어 목공소를 내놓고 집회장소로 삼았다. 그는 일생 이현필을 본받아 하나님의 충직한 종으로서 동광원을 가꾸며 헌신했다.


이현필은 나이 30세 전후
홀로 산에 은거하면서 금식과 명상생활을 하였다.

화순의 화학산과 남원의 지리산에서 수년씩 홀로 기도생활을 했다. 산에 파묻혀 기도하였고,

특별히 소명을 받아 거룩한 삶을 사모하는 10여명의 소년 소녀들을 제자로 삼아 성경을 가르치고 훈련하였다.

남원에서 몇 십리 들어가는 서리내(仙人來)라는 곳과 그 앞산을 타고 내려오면 갈보리라는 동산이 있는데

이곳에서 제자들과 생활하면서 기도 및 경건생활과 노동 그리고 성경공부 등을 통해 제자훈련을 시켰다.

남원 지방의 독신 기독교인들 중에서 그를 존경하고 따르고자 산으로 모여든 것인데 이것이 동광원의 모체가 되었다.

어머니 강남순과 딸 김금남 두 모녀는 그때부터 이현필을 스승으로 모시고 따랐다.

그때 김금남은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진로문제를 놓고 날마다 고민했다. 그래서 교회에 들어가 열심히 기도하던 중에 “네 몸을 산 제사로 드리라!하는 신비한 음성을 들었다.

그리고 어머니와 함께 진로문제를 놓고 갈보리에서 백일기도를 했는데 이 기도를 통해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수도생활을 하기로 결심을 했다.

자나 깨나 산 제사를 드리는 방법이 무엇일까 생각하던 중에 마음에 응답되기를 일생 동정을 지켜 자신을 주님께 바치는 길이라는 깨달음이 왔다는 것이다.

그때 교육은 보통 보름씩 산중에서 행해졌다.

그는 제자들에게 예수의 정신을 본받는 경건훈련을 진행할 때 매우 엄격하고 철저했다.

그는 또한 제자들에게 자주독립정신, 청빈과 검소 생활을 배우게 했다. 성경을 배워주고 겸손과 사랑의 실천, 그리고 양심훈련을 시켰다. 먹을 것이 없던 때라 주로 풀뿌리와 쑥을 먹었다고 한다.

그 자신 스스로가 짚신을 신었고 산중 길을 걸을 때는 추운 겨울에도 맨발로 다녔으며, 단벌옷과 불을 때지 않는 차가운 방에서 지냈다. 청빈하고 가난하게 사셨던 예수의 삶을 본받고자 몸소 모범을 보인 것이다.

서래내는 남원 수지면에서 지리산을 등산하는 도중에 있는 경치가 뛰어난 곳인데 이현필은 그곳의 우거진 솔밭이나 갈대밭 속에 한 번 엎드리면 꿈적도 않고 일어날 줄 몰랐다고 한다.

산에 사는 까마귀가 송장인줄 알고 곁에 와서 ‘까악, 까악’ 하고 울다가 그래도 움직이지 않으니

부리로 쿡쿡 찔렀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화학산 기도 3, 지리산 기도 4년을 통해 겸손과 자비와 청빈의 수도자인 성 프란치스코의 모습을 닮아갔다.

 

이현필은 1948년에 훈련시킨 제자들과 함께 광주 YMCA로 가서 봉사했는데 이때 이들의 모습을 본 당시 YMCA 총무 정인세는 깊은 감동을 받아 바로 이현필을 따르게 되었다.

정인세는 말하기를 그가 만난 인물 중에서 이현필선생 만큼 그릇이 크고 깊은 인물은 없었으며 이현필선생의 그 깊은 속은 자기로서 도저히 측량 할 수 없었다고 했다.

이현필의 전기를 쓴 엄두섭 목사는 “보통 생각하기를 이현필 선생은 예수를 본받으려고 하신 분이고 하나님만 사모한 분이니 그것밖에는 다른 일은 관심이 없는 분인 줄 짐작하지만 그의 포부는 세계적으로 넓었고 애국심에 불탔으며 가난한 사람들과 사회적 부조리에 대한 걱정으로 밤잠을 이루지 못했던 분”이라고 전한다.

 

이현필은 식사생활에 있어서 일식주의자였고

철저한 채식주의자였다. 하루 한 끼만 식사를 했는데 꼭 저녁에만 했다. 주로 금식으로 지내는 때도 많았다.

또한 그는 많은 신비적인 체험에 대해서는 일체 침묵하였고 꿈 이야기도 하지 않았으며 다만 성경을 가르쳤으며

하루 종일 하는 대화가 그대로 설교였다.

그는 모든 생명을 사랑하고 아끼는 자비심으로 빈대나 벼룩마저도 죽이지 않았다고 한다.

간혹 누가 아프다고 그이의 기도를 받고자 원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나는 신이 아니오.”하고 거절했다.

그리고 아프다는 이에게는 아프게, 더 아프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오.” 하였다.

 

이세종으로부터 전수된 순결사상과 남녀유별에 대해서는 무서울 만큼 엄격했다.

이현필도 27세에 결혼을 했으나 그의 스승인 이세종 선생처럼 남매지간으로 지낼 것을 권유하고 실천했다.

후일 이현필 선생의 부인은 개가했다.

이러한 순결사상은 그를 따르는 결혼한 제자들에게는 참 견디기 힘든 문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현필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이 결단하여 순결생활을 지켰으며,

때로는 많은 사람이 남편과 집을 놔두고 아이들을 데리고 동광원에 들어와 산 사람들도 많다.

그래서 이현필 선생이 한 번 지나가면 온 동내, 도시가 난리가 났다. 자신의 부인과 생이별하는 일이 벌어지거나 잠자리를 거부하는 일이 생기자 여러 곳에서 비난이 잦아졌다.

특히 전라남도 교회 목사들은 교인들이 대부분 빠져 나가 이현필을 따라 다니자 그를 ‘산중파’ ‘금욕주의자’라

비난하고 그를 이단시하였다.

그러나 한 번이라도 그를 찾아와 대면한 목사들은 “이 길이다!”하고 소리쳤다. 사람들은 “이분은 참 믿음의 사람이다. 참 사랑의 사람이다. 성경말씀대로 살면 이렇게 된다. 이런 것이 믿는 것이요 사랑이다.” 하고 감격했다.

여순반란사건 이전에는 주로 경기도 능곡을 중심으로 농사와 탁발훈련과 전도활동을 했다. 그리고 복음전도대로서 그들은 또한 남원 순천 여수 강진 해남 광주 등 남부지방을 돌며 탁발하고 전도활동을 펼쳤다.

 

당시 청년 김준호는 의사를 지망하며 공부하고 있었는데 이현필 선생을 만나 평생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다.

김준호는 당시 해남 교회내에서 살면서 손수 교회청소를 담당하고 혼자 기도하고 성경 보면서 공부하던 학생이었다.

하루는 그 교회 집사가 “우리 교회에 참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이 올 것이오. 그는 광주에 사는데 목수 일을 하고 시래기죽만 먹으면서 성경을 공부하고 사는데 항상 기쁨이 충만하여 종일 하나님만 찬양하는 사람이라오.”하고 말해주었다.

그때가 1946년 가을이었다. 강단의 책상 위에 국화를 꺾어다 화병에 놓고 예배를 준비했다.

트럭을 타고 두 분이 내려왔는데 모두 한복 바지저고리를 입었고 한 분은 톱 망치 등 목수연장을 담은 걸망을 지고

내렸다. 이현필 선생과 오북환 집사라 했는데 맨발에 고무신을 신고 있었다.

청년 김준호는 속으로 ‘저런 분이 어떻게 믿기에 잘 믿는 사람일까’ 하고 있었는데 이현필선생이 설교하러 책상 앞으로 나와 앉았다. 그런데 그가 책상 위 화병에 놓여있는 국화를 보고는 깜짝 놀라서 아주 슬프고 안타까운 음성으로 “어찌하여 이 꽃을 꺾었습니까? 꽃은 꺾지 마시고 피어있는 그대로 두고 보셔야 되는데...”하시며 한참을 말없이 슬픈 표정으로 그 꽃을 바라보았다.

그때 그 순간에 김준호는 이현필선생의 그 말씀과 그 모습을 통해 온 몸을 울리는 한없는 감동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애틋함과 온 우주를 껴안는 깊은 사랑을 느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때부터 그는 이현필을 스승으로 모시고 평생을 따르면서 스승께서 보여주신 그 사랑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한다.

 

이현필은 제자를 사랑하여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서라면 맨발로 30 50리 산길을 달려갔다.

6.25때는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미국인 유화례 선교사를 살리기 위해서 갖은 희생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버스를 타거나 차를 탈 때면 언제나 제자들에게 가장 나중에 타자며 다른 사람들이 다 탄 후에야 차에 올랐다.

다른 사람들이 다 먼저 구원을 받은 후에 자기는 맨 마지막으로 구원의 방주에 올라타겠다는 철저한 이웃사랑이요 보살정신이었다.

 

이현필은 말년에 후두결핵으로 고생하였는데

생을 마감하기 전에 뜻하는 바가 있어 제자들에게 고깃국이 먹고 싶다고 말했다.

그래서 제자들은 평생 채식주의자였으며, 자신들에게도 채식주의를 가르친 스승의 말에 놀라면서도 임종이 가까운지라 말씀대로 생선국을 끓여 들였더니 겨우 두 숟갈을 넘겼다고 한다.

이것이 유명한 ‘파계’이다.

이현필은 자신을 따르던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한 참 믿음은 사라지고 이현필 자신이 걸어 왔던 삶을

율법적으로 좇지나 않을까 염려하였고 또 결핵을 앓고 있는 제자의 건강을 염려했던 것이다.

 

그는 또 제자들에게 선행위주의 노력이 아니라 “예수의 보혈만이 나를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을 고백으로 가르쳤다.

이현필은 복음의 삼덕을 순결, 청빈, 순명으로 보았고 이를 위해 수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특히 ‘청빈’ 곧 가난에 대해 이해함에 있어 자신이 처한 상황을 극복하는 자족의 방법과 나눔을 통한 삶을 말했다.

그 실천적 장이 되었던 것이 바로 ‘동광원’이다.

동광원은 수도 공동체로서 본원은 남원에 있고

분원으로서 진도분원, 지지리 분원, 함평 분원, 도암 분원, 광주 귀일원 분원, 소화자매원, 전북 진달래의 집, 경기도 능곡과 벽제 계명산, 갈원 등지에서 그 제자들이 수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