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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행복으로 이끄는 성인들

‘맨발의 성자’ 이현필

 

 

 

 

‘맨발의 성자’ 이현필

   

한국기독교 120년 숨은 영성가를 찾아…

이세종 선생에 감화해 수도, 신분 불문 누구나 귀히 여겨

 

  

전북 남원 지리산 서리내. 원래 이름은 선인래(仙人來)로 신선이 온다는 산골짜기였다.

이곳을 찾아온 이현필(1913~64)은 기도하러 숲 속에 들어가면 그대로 나무가 되고, 바위가 되어버렸다.

다 떨어진 옷을 입은 채 꽁꽁 언 그의 머리 위 하얀 서리에서 아침 햇살을 받아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면, 새가 날아와 목석인 듯

쪼아댔다

 

배고픈 그 시절 그는 “내가 먹으면 다른 사람 먹을 몫이 줄어든다”며 굶기를 밥 먹듯했다. 뱃가죽이 늘 등에 붙어 있어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 그가 눈이 가슴까지 쌓인 어느 날 새벽 남몰래 길을 나섰다. 3일 동안 먹은 것이라곤 없는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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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다른 수도자들과 함께 기도하던 여성수도자 금남은 행여 이 선생이 눈밭에 쓰러지지나 않을까 염려가 되어 다른 동료 한명과 몰래 뒤를 밟았다. 눈이 너무도 많이 와 어디가 땅이고 어디가 벼랑 끝인지 구분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현필은 사뿐 사뿐 날듯이 나아갔다. 둘은 선생의 발자국만을 밟으며 따라갔다. 이현필은 그렇게 오감산까지 무려 40리를 걸었다. 오감산 산막에서 홀로 수도 중인 제자가 눈 속에서 얼어 죽지 않았을까 밤낮으로 기도하다가

몸소 눈밭을 헤치고 그를 찾아 나선 것이었다.

 

전북 남원시 대산면 운교리 남원동광원에서 이현필을 따르는 30여명의 수도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김금남(79)원장은 스승을 회고

하다 그의 사랑이 다시 느껴지는 듯 한동안 입술을 떤 채 말을 잊지 못한다.

 

이현필은 대중설교를 하지 않았다. 오직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을 예수처럼 대했다. 그는 광주와 무등산 일대에서 여순반란사건과 6.25 뒤 거리를 떠돌던 수많은 고아들과 폐병 환자들을 거두었다. 그는 맨발로 눈길을 걸으며 탁발을 해서 고아와 환자들을 먹이면서 돌보다 결국 자신도 폐병에 걸려 51살에 귀천했다.

 

 

예수 그리스도 이후 최고의 성인으로 추앙받는 프란체스코와 이현필을 평생 탐구해온 은성수도원 창립자 엄두섭 목사는

 “이현필은 프란체스코와 비교해 봐도 누가 더 우월하다고 할 수 없을 정도의 인물”이라고 평했다. 또 함석헌의 스승 유영모는

아들뻘인 그한테서 빛을 본 뒤 광주(光州)를 빛고을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이를 들은 함석헌에 의해 빛고을이란 말이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이현필은 전남 화순군 도암면에서 태어났다.

 10대부터 기독교를 접해 전도사 생활을 하며 평범한 목회자가 될 수 있었던 그의 삶이 송두리째 바뀐 것은 ‘도암의 성자’ 이세종을 만난 뒤였다.

이세종은 “나 같은 사람이 또 하나 나올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그가 바로 이현필이었다.

 이현필은 스승처럼 아내와 육적인 관계를 단절하고 정절의 수도자가 되었다. 그는 화순 화학산에서 4, 지리산에서 3년간 기도하던 중 신비체험을 통해 거듭났다. 그때부터 그의 눈은 육안에서 영안으로 바뀌었다. 광주에서 600명의 고아들을 돌볼 때 그를 따르는 동광원 식구들은 자기 자식들을 고아들 속에 넣어 똑같이 길렀다.

걸인이나 창녀를 대할 때도 그는 천사처럼 귀히 대했다. 높고 낮고, 더럽고 깨끗한 육안의 시비 분별을 벗어난 영의 눈이었다. 그는 어떤 사람이든 어떤 물건이든 천히 여기면 자기도 천해진다고 했고, 사랑과 생명은 하나요, 사랑과 빛은 하나이며 십자가의 피는 사랑이요, 생명이라고 했다.

그에겐 기도시간이 따로 없었다. 삶이 곧 기도요. 일이 곧 기도였다. 모든 것은 자급자족이었다. 그는 배부를 때 배고픔을 대비하라고 했고, 살아있을 때 죽음을 생각하라고 했다. 이처럼 철저히 미래를 준비하게 했고, 실내로 들어갈 때도 언제든 나올 때를 대비해 바깥쪽을 향해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놓고 들어가는 준비성이 몸에 배도록 했다. 또 밥을 먹을 때 한 숟가락씩 덜어 굶주리는 사람을 돕자는 일작운동을 펼쳤다. 이런 동광원의 훈련은 박정희에 의해 새마을운동 초대 연수원장으로 초빙된 그의 제자 김준에 의해

새마을지도자 훈련으로 이어졌다.

 

 

결핵환자를 돌보다 결핵에 감염돼 피골이 상접한 그를 업고 다녔던 한영우(78) 장로는 “선생님은 의인은 교회 안만이 아니라 장돌뱅이 가운데도 있다고 했다”며 “그의 사랑은 어떤 틀에도 갇히지 않는 우주적 사랑이었다”고 말했다.

지금도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광주 귀일원에서 중증장애인을 돌보고, 전북 남원, 장수, 경기도 벽제, 광주 무등산, 전남 화순, 함평, 진도 등에서 노동수도공동체를 일구어 호의호식과 출세와 성공과 승리의 대로가 아니라 절제와 양보와 헌신의 좁은 길을 말 없이 걷고 있다

 

 

 

▲ 노구의 몸에도 스승 이현필의 삶을 따라 철저한 자급자족을 위한 노동과 감사로 살아가는 남원동광원 식구들 (사진제공 조연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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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발의 성자’라 불리는 이현필(1913~1964) 선생은 예수님처럼 거룩한 삶을 동경하며, 고아와 걸인 등 어려운 사람들을 섬긴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신학자들은 이현필 선생이 신학자나 목회자, 장로는 아니었지만, 예수의 삶과 성경말씀을 실천했던 ‘신앙의 뿌리’였다고 평가한다. 이 선생이 사랑과 순결, 초월 등을 몸소 실천하며 청빈하게 살았기 때문이다.

또한 신학자들은 이현필 선생을 통해 ‘고난의 예수•이름도 빛도 없이 살다간 비천한 예수•청빈의 예수’를 볼 수 있다고 까지 칭송한다.

온몸으로 모범 보인 삶 살아

이현필 선생은 13세 때 일본인 목사 ‘관파’(官波)에게 복음을 접한 후, 1928년 광주농업실습학교에 다닐 때 숨은 성자 이세종 선생을 만나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됐다.

이현필 선생은 이세종 선생의 수제자가 되면서 거룩한 삶을 동경하며 몸소 실천했다. 이후 그는 제자들에게도 자주독립정신과 청빈을 가르쳤다. 특히 그는 예수의 정신을 본받는 경건훈련에 매우 철저했다.

이현필 선생과 15년을 동고동락한 전남 동광원의 김춘일 씨는 “이 선생님은 기독교를 지식이나 이론으로 믿지 않고, 성경말씀 그대로를 믿었다”며 “그는 예수님처럼 온몸으로 모범을 보인 ‘성인의 삶’을 살았다”고 전했다.

또한 이 선생은 성결•독신•정절•순결 등으로 항상 거룩한 삶을 강조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김 씨는 “이 선생님은 ‘깨끗하고 거룩한 삶은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며 “‘이런 삶은 신앙으로만 이루어 질 수 있다’는 것을 늘 강조하셨다”고 밝혔다.

이렇듯 이현필 선생은 철저한 ‘자기 비움’을 실천하면서 살았다. 그는 추운 겨울에도 맨발과 단벌옷으로 다녔으며, 불을 때지 않은 차가운 방에서 지냈다고 한다. 더구나 그는 ‘일식주의자’여서 하루에 한끼를 먹었으며, 금식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전해진다.

고아와 걸인 섬기는 삶

이현필 선생은 625 동란 이후 가난에 허덕이는 민족의 아픔을 제자들과 함께 나누며, 동광원이라는 수도공동체를 만들게 되었다.

이 선생은 동광원에서 고아와 걸인, 나그네들을 위해 ‘하룻밤 재워주기 운동’과 ‘십시일반 운동’ 등을 펼쳤다.

김춘일 씨는 “이 선생님은 ‘농사를 지어 자급자족하면서 어려운 사람을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항상 강조했다”고 밝혔다.

이렇듯 성인의 삶을 실천하는 이현필 선생을 보면서 부녀자 청년 할 것 없이 가족을 버리고 그를 따랐다. 하지만 이로인애 이 선생에게 시련이 닥쳐왔다. 교회의 일꾼들이 빠져 나가자 목회자들이 분노해 경찰에 신고하는 등 원성이 잦아졌고, 이 때문에 이 선생은 이단으로 몰리기도 했다.

하지만 한 번이라도 그를 찾아와 대면한 목사들이라면 “이 길이다”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분은 참 믿음의 사람이다’,

 ‘참 사랑의 사람이다’, ‘성경말씀대로 살면 이렇게 된다’, ‘이런 것이 믿는 것이요 사랑이다.라고 하면서 감격했다는 것이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섬겨야 한다고 강조해

이현필 선생은 1964 3 17일 마지막 예배시간에도 ‘만물은 내 지체요 인류와 이웃은 내 몸’이라고 강조하면서 신앙고백을 했다고 전해진다.

이현필 선생의 임종을 지켜본 김춘일 씨는 “이 선생님은 돌아가시는 순간까지도 농사로 자급자족하면서 불쌍한 사람들을 섬기며

살라고 교훈 하셨다”며 “‘가난과 순결은 믿는 사람들의 복’이라고 하셨다”고 밝혔다.

김 씨는 “이 선생님은 인류를 당신 몸처럼 사랑하시고, 예수님 발자취를 그대로 따른 삶을 사셨다”며 “15년 동안 성인 같은 분을

모시고 살아서 정말 행복했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는 이제는 이현필 선생과 같은 삶을 배우러 목회자나 신학생, 평신도 등이 많이 찾아온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