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행복으로 이끄는 성인들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경건의 도장 - 동광원

샘물 퐁퐁 2010. 3. 10. 03:27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경건의 도장

동광원(東光園)

한국의 ‘맨발의 성자’에 대하여 들어본 적이 있는가?

동광원 이야기는 이 맨발의 성자로 불리는 이현필 선생의 행보로부터 시작된다. 이현필선생은 1913년 전남 화순군 도암면 권동에서 평범한 농부인 이승로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보통학교를 마친 뒤 부친의 사업 실패로 집에서 몇 십리 떨어진 영산포에 나가서 장사를 하다가 13세 때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 후 한 때 서울에 올라와 YMCA에서 영어와 성경을 공부하였는데, 그 때 원경선 선생(현재 풀무원 공동체의 원장)을 만나 평생 교우가 되었다. 광주에 내려와서는 신안동교회 전도사로 시무했으며, 해방 전에 광주 YMCA의, 강순명 목사를 중심으로 한 ‘독신 전도단’에서 이준묵(후에 해남교회 목사, 총회장), 차남진 박사 등과 전도활동을 하였다.

이현필의 생애가 결정적으로 변한 것은 22세 때 “화순군 도암면의 성자”라고 불리우는 30년 연상의 이세종 선생을 만난 뒤 부터였다. 감리교 신학대학 교수인 정경옥 목사는 이세종을 가리켜 “한국에 성인이 나왔다”고 소개하였는데, 이세종은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고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살았던 사람이었다. 자기 아내를 누님 이라 부르며 부부가 남매 같이 살았고 일제시대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깊은 산중에서 지냈다. 또한 밤에는 성경을 암송하고 낮에는 인근 마을의 처녀 총각을 모아 성경공부를 시켰다. 그는 특히 순결사상을 강조하였다. 그때 함께 다니며 배우던 젊은이들 중 수제자가 바로 이현필이었다.

이현필은 스승의 가르침과는 달리 결혼을 하였으나 2년도 안되어 후회하고, 아내와는 남매관계로 살게 된다. 이세종 선생의 순결사상의 의미를 깨닫고 뒤늦게 실천하게 된 것이다. 후일에 이 점은 비난의 대상이 되었지만 그들은 주님의 길을 따르기 위해 가정만이 아니라 재물과 소유, 인간의 모든 것을 희생시키려는 것이었다. 30세를 전후한 수 년 동안 그는 주로 홀로 산에 은거하면서 금식과 명상생활을 했다. 해방 이듬해인 33세 대는 남원 서리내골에서 10대의 소년 소녀들을 모아 성경을 가르치고 훈련시켰다. 그때 훈련받은 소녀 일곱 명는 40여 년 세월이 지난 지금도 꾸준히 정절을 지키면서 동광원 회원으로 수도 생활을 하고 있다.




주님 가신 길을 따르려 했던 젊은이


이현필은 일생 동안 “주님 가신 길을 그대로 따르려”했고 동시에 ‘자기 완성’을 이루려 한 사람이었다. 그의 기도생활, 극기생활과 말씀을 가르치는 능력은 매우 뛰어났고 인격적 감화력도 놀라운 것이어서 한두번 그를 대한 사람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듯이 그를 따라나섰다. 사람들은 그를 “참 믿음의 사람, 참 사랑의 사람”이라 불렀다.

이현필에게서 “예수의 삶”을 보고 그를 따랐던 사람들의 대부분이 지금도 그대로 남아 독신 수도 생활을 하고 있다. 그는 주로 맨발로 다녔으며 하루 한 끼로 생활하면서 검소와 극기의 삶을 실천하였다. 그의 이러한 생활은 당시 기성교회로부터 ‘산중파’, ‘금욕주의자’라는 바난을 받았다. 그러나 동광원을 일생 동안 연구한 엄두섭 목사는 “이현필과 동광원의 행보가 기성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 독선적이고 과격하게 보일 수 있지만, 기성교회에 피해를 끼치거나 위험한 단체가 아니라 고요히 예수의 길을 가는 수도단체이다”라고 말한다.




신앙과 실천의 균형잡힌 영성


이현필의 주위 사람들로는 우선 그의 수제자격인 오북환 장로와 김준호 선생이 있다. 오북환 장로는 남원에서 목공소를 경영하다가 이현필을 만나 그를 따랐고, 현재까지도(80세) 동광원의 정신적 지도자로서 성경교사로 사역하고 있다. 김준호 선생(75세)은 이 선생을 만난후 소년들을 가르치는 교사로 시작하여 이 선생과 동고동락하였으며 동광원의 산 증인으로서 오북환 장로와 함께 오늘날까지 동광원의 영적 지도자로 서있다. 그 외에 많은 자매들이 이 선생을 따라 이름도 없이 동광원 사역에 평생 헌신하게 된다.

이현필과 당대의 석학 유영모와의 만남은 동광원의 영성 형성에 중요한 것이었다. 유영모 선생은 남강 이승훈 선생이 세운 오산학교 교장이었으며 유명한 한학자로서 수많은 훌륭한 제자들을 길러내었다(함석헌 선생도 그의 제자 중 하나였다). 이현필과 유영모는 서로의 사상에 귀의했으며 교제를 나누었다. 그는 이현필에 대해 “한국에 인물이 없는 줄 알았더니 광주에 반쪽이 있었구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유영모 선생은 동광원에 내려와 동광원 식구들에게 자주 강의하곤 했다. 유영모의 영성이 ‘믿음’으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강조한 것이라면 이현필의 사상은 이웃에 대한 비계산적, 무차별적 ‘사랑’의 실천이었다. 두 맥의 만남을 통해, 자칫하면 은둔적이고 신비적인 영성으로 치달을 동광원이 균형잡힌 영성을 갖추게 되었다. 유영모의 민족적이고 한국적인 여운이 뒷받침되어 한국의 토착적 주관을 가진 믿음을 이 땅에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도탄에 빠진 동포를 위하여


이현필은 한때 탁발 전도단을 만들어 제자들에게 신앙훈련과 전도훈련을 시켰다. 그러던 중 6.25사변 일년 전 여순사건으로 고아들과 유리하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동포들을 돌보기 위해서 탁발 수도를 그만두고 전남 화순군 화학산 청소마을에서 고아원을 시작했다. '50년 1월 광주에서, 정인세 선생을 통하여 YMCA를 중심으로 ‘동광원’이란 이름의 고아원이 생기자 이 선생과 그의 제자들은 YMCA가 시작한 동광원의 고아들을 헌신적으로 섬겼고, 결국 동광원은 이현필 선생의 운동단체가 되었다. 또 하나의 사역은 오갈 데 없는 많은 사람들을 “하룻밤씩 재워 주는 운동”이었다. 광주 역전에서 헤매는 사람들을 데려다가 따뜻하게 대접하고 재워 보내는 이 사역은 후에 ‘귀일원’(歸一園)의 모체가 되었다.

여순사건과 전쟁에 휘말린 민족의 역사 현장에는 고아뿐 아니라 과부, 불구자, 무의탁 노인, 문둥병자, 폐결핵 환자들이 들끓었다. 동광원의 고아 사역이 귀일원으로 통합되면서 애초에 10여명을 돌보던 것이 6백여명으로 늘어난다. 그러나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귀일원의 식량사정은 어려워졌다. 당시엔 자체 수입이나 국가보조가 없던 터라 이 선생과 제자들은 길거리에서 쓰레기통을 뒤지고 시장에 떨어진 푸성귀들을 모으며 광주기독병원의 환자들이 남긴 밥을 얻어 거리의 사람들을 먹였다.

'64년 이현필 선생은 ‘일작 운동’ (一勺運動)을 시작한다. 이는 매일 밥을 지을 때 자기 몫에서 한 숟가락씩 떠서 모으는 운동이다. 30여명이 일작하면 밥 그릇이 되고, 이것이 3백 명, 3천 명으로 늘어나면 학교, 병원도 세울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십원 운동’도 벌였는데, 누구나 십 원씩 덜 쓰고 모아서 불상한 겨레를 돕자는 것이었다. “일작씩 걷어 귀일원으로”, “갈 곳 없는 이 하룻밤씩 재워 보내자”라는 이 운동이 시작되면서 사방에서 양식들이 들어왔고 가난한 이웃들을 돕는 일도 확산되었다.

이현필 선생과 은둔 수도하는 동광원 지체들에 대해서 생각할 때 흔히 기도 외에는 관심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그들은 가난한 사람과 사회적 부조리에 대한 걱정으로 밤잠을 이루지 못하곤 한다.

이 선생과 그의 제자들의 모임은 아직 이름이 없다. 우리가 수도 공동체로서 ‘동광원’이라고 부르는 것은 고아원 사역에서 유래된 편의상의 명칭일 뿐이다. 그러나 이현필 선생의 운동 아래 ‘동광원’은 수도 공동체를 대변하고 ‘귀일원’은 사회복지 사역을 대변하게 되었다. 이현필 선생은 1964년 5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소박한 수도생활


현재 동광원 식구들은 전국에 약 80여 명 가량이며, 남녀 모두 독신생활의 공동체 형태로 살고 있다. 주로 전라도에 위치해 있으며 진도 분원, 남원 분원, 지지리분원, 함평 분원, 도암 분원, 광주 귀일원 분원, 소화 자매원, 전북의 진달래의 집, 경기도 능곡과 벽제 계명산, 갈원 등지에도 있다. 이 분원들은 크게 두 부류로 구분된다. 첫째 부류는 산곡에서 노동하면서 수도하는 분원들이며, 둘째 부류로 광주 귀일원 소화 자매원, 전북 진달래의 집처럼 사회복지 시설을 운영하고 있는 분원들이다.

동광원은 경제적으로 자급자족을 원칙으로 한다. 그래서 각 분원들은 대체로 농사, 양봉 등의 일을 한다. 어느 분원이 부족하면 서로 작물을 보내어 나눈다. 이들은 하루 두 끼의 채식을 먹으면서 최소한의 경제로 살아간다. 그래서 이들은 먹는 것만 해결되면 욕심없이 살아갈 수 있다고 한다. 하루 두 번의 기도 모임과 노동, 농사 등이 그들 생활의 기본이다. 손님이 오면 그냥 밥 먹여주고 소박한 사랑으로 대한다. 수도 생활을 주로 하는 각 분원들은 모두 산골에 위치해 있으며, 집들은 여느 시골 사람들이 사는 보잘 것 없는 한옥이다. 동광원이란 간판도 달려 있지 않고 경계를 짓는 담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정결함, 고요함, 평온한 기운이 이들의 구별된 생활을 말해 준다. 이처럼 동광원은 산곡에 들국화처럼 그윽히 향기 날리며, 바람 따라 구름 따라 흘러가듯 천의무봉(天衣無縫)하게 고요히 영원 속을 살아간다.

이들의 예배는 보편적인 개신교 예배처럼, 찬송, 기도, 말씀 강론 등으로 이루어진다. 기도는 침묵으로 드리며 찬송은 높은 소리로 크게 부르지 않고 느리고 고즈넉이 부른다. 예배 드릴 때나 성경 강론을 들을 때는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무릎을 꿇는다. 세계의 유수한 기독교 공동체들이 자신들의 영성을 반영하는 고유한 찬양들이 있듯, 이들 역시 자신들의 독특한 찬송을 갖고 있다. 주로 이현필 선생과 유영모 선생, 김준 선생, 현동완 선생 등이 작시한 노래들인데 매우 한국적인 정취가 있는 가락들이다. 요즈음은 프랑스 떼제 공동체의 찬양도 함께 부르고 있다.

이들은 산곡에 은거하고 있지만 마을 사람들로부터 좋은 평을 받고 있다. 마을에 작업이 있으면 동광원 자매들이 여러 모양으로 참여하고 돕고 있다. 지지리 분원 근처에 사는 김영목 씨는 “동광원 자매들은 매우 좋은 사람들이다. 마을을 위해서 소리없이 봉사한다. 마을 사람들은 그들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동광원에는 어떤 규칙, 약속, 제도 같은 것이 거의 없다. 심지어 입회하는 절차도 없다. 동광 분위기의 특징은 ‘부드러움’이다. 하나님 뜻대로 살고 싶어서 바른 신앙을 찾다가 현재 동광원에 2년째 살게 된 박성백 씨는 “동광원에 처음 왔을 때 한 달이 지나도 원장이 나타나지 않고 지시하는 사람도 없어 적응하기 힘들었습니다. 매우 어려운 순간에도 한 지체가 지시하는 방식이 아니라 성경 말씀으로 읽어 주는 가운데 문제를 해결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는 스스로가 일을 알아서 해 나가며 한 영혼을 지켜보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동광원에서 방을 나오면 신발의 코가 돌려져 있다. 누군가가 그림자처럼 해놓은 것이다.




고통당하는 이웃의 현장 속에서


현재 광주 봉선동에 있는 귀일원은 정신 질환자 1백 95명을 돌보고 있다. 사회복지 법인으로 등록된 귀일원 운영비의 80%는 국가의 지원으로 충당되지만 20여명의 자원 봉사자들은 월 오만원의 용돈을 받을 뿐, 나머지는 운영 재정으로 적립된다. 귀일원에 소속된 동광원의 자매들은(그들은 ‘언니’라고 불린다) 정신질환자들을 돌보면서 수도생활을 하고 있다. 바로 옆에 우뚝 솟은 고층 아파트와 대조적으로 귀일원은 낡은 구식 건물이지만, 그 곳에서 섬기는 언니들의 삶에는 조용한 활기가 넘친다. 네 동에 분산 배치된 정신 질환자, 정박아들을 돌보는 언니들의 정성은 지극하다. 늘 수줍은 모습으로 일하는 언니들은 식사, 청소, 빨래, 환자들의 대소변 가리기 등, 일반 장정들도 감당하기 힘든 일들을 거뜬히 해낸다. 귀원 본부는 구식 건물이지만 귀일원 사역이 확장되어 새로이 지은 건물은 현대식이며, 장애자들을 위한 훌륭한 시설을 갖추고 있다. 한 언니는 “정신질환자들의 일부가 이곳을 도망쳐 다른 시설이나 개인 집에 수용되어 있다가 다시 돌아온다.”고 말한다. 사실 이곳에 수용되어 있는 장애자들은 매우 밝은 표정들이었다.




한국의 자생적 수도 공동체


동광원은 그 형태를 분류하자면 독신 수도공동체라 할 수 있다. 탁원한 영적 지도자에 의해 시작되어 어느 특정 교파에 소속되지 않은 기독인들의 모임이며, 서구 신학의 영향을 받지 않은 한국의 순수 자생적인 공동체이다. 전통적인 개신교 입장에서 볼 때 동광원은 기본적으로 성경을 순수하게 믿는 신앙적 토대를 갖고 있으며, 동시에 말씀을 있는 그대로 실천하는 삶 또한 철저하다. 이런 철저함이 곧 독신의 형태로 나타난다. 동광원이 균형잡힌 영성을 생활 속에서 발휘하자 이를 눈여겨 본 가톨릭에서는 한때 그들을 가톨릭수도회로 편입시키려고 매우 힘쓰기도 했다고 한다.

이현필 선생의 제자인 김준호 선생(75세)은 “동광원의 원래 목적은 관상 수도하는 생활이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고아와 과부가 많아지자, 그들과 함께 살면서 돌보기 시작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야고보서 1장 27절 말씀은 동광원 영성의기조가 되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즉 일이 있을 때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부분은 고아와 과부같은 고통당하는 이웃을 돌보는 생활이지만, 동시에 보이지 않는 동광원의 삶은 세상 속에 있지만 자신을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고 주님 앞에 경건하게 살아가는 수도 공동체 생활인 것이다.

어떤 강물이든지 거슬러 올라가면 하나의 옹달샘에서 시작된다. 의인 열 사람은 정치가의 눈에는 단 열 표로밖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시각으로 볼 때는 한 시대의 역사를 좌우하는 열쇠이다. 이 사회에 던져주는 동광원의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들은 몇 사람 안되지만 이 혼탁한 시대에 조용히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있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동광원에는 조직도 없고 울타리도 없다. ‘비교파, 비조직, 비형식’이 그들의 외형적인 특징이다. 이들은 후계자를 구태여 세우려고 하지도 않는다. 동광원을 아끼는 많은 이들은 사람들을 키우는 제도적인 장치가 필요하지 않느냐고 주문을 하지만, 이들은 보여지는 것이나 없어지는 것에 대해 연연하지 않는다. 어떤 기독인들의 모임이 생기면 형태와 조직을 갖게 되고 제도적으로 나아가다 보면 생명력이 소멸된다. 울타리가 없다는 것은 오히려 생명의 보존에 큰 강점이 될 수 있다. 이 점은 교회사 속에서 늘 지적되는 것이다. 교회사 속에서 교파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실존적으로 존재하며 빛으로서의 사명을 다하다가 소리없이 사라진 본질적인 신앙의 모임들이 많았다.

그러나 한국적인 상황에서 교파에 소속되지 않으면서도 존속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따를 수 있다. 이에 대해서 동광원 사람들은 “우리는 외형적인 모습에 연연해 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내적 생명이 계속 살아서 누구의 가슴에든지 심겨져서 열매를 맺는 데 있습니다. 이미 그 빛은 뿌려졌고 이 빛이 누군가의 가슴에 가서 뿌려지고 심겨지고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이편필 선생은 임종 6개원 전 동광원의 미래와 후계자 문제들 제반에 대해서 그의 제자 김준호 선생에게 “나는 공동체 욕심이 없었다. 절대로 모여 살려는 것이 아니었다. 단지 하나님이 시키시니까 했을 뿐이다. 하나님이 시작하셨으니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것이다. 나는 세상 끝까지 가서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교제하면서 살고 싶을 뿐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가장 한국적이면서 가장 세계적인 모임


박근원 교수는 그의 책 『한국 그리스도교 영성의 뿌리』에서 “이세종, 이현필로 이어지는 동광원의 영성은 한국 개신교 영성운동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고 평했다. 은성수도원의 엄두섭 목사는 동광원을 알기 위해 5년 동안 연구한 후 『맨발의 성자』라는 책을 냈다. 동광원의 의의는 동광원이 어떤 서양 선교사들이나 서구신학의 영향을 받지 않고 성경 말씀에서 직출(直出)된 한국사람들의 자생적인 본질적 신앙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는 점에 있다.

대천덕 신부는 한국의 기독교가 너무 서구화되어 있고 모든 것을 서구 신학의 잣대로 재려는 경향을 아쉬워한다. 그는 “동광원 같은 한국인의 자생적인 공동체는 매우 귀하며 계속 발견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다”고 하였다. 동광원처럼 개신교 수도적 영성을 지니면서 본질적인 기독교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상통하는 프랑스 떼제 공동체도 동광원의 영성에 깊은 관심을 표명하였다. 떼제 공동체의 지도자 로제 형제(Brother Rose)는 현재 김준호 선생과 서신으로 교분을 쌓고 있다.

키에르케고르는 예수가 본래 의도했던 기독교를 회복하고자 하는 의미에서 ‘실존’을 부르짖었다. 자크 엘룰은 “기독교는 참된 실존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는 것이지,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였다. 동광원은 그렇게 실존하고 있다.

동광원 같은 모임은 세계적으로 유래가 없다. 동광원은 이제 한국 개신교 공동체로서는 가장 오랜, 50년의 역사를 이끌어 가고 있다. 필자는 전 세계를 통틀어서 교회의 본질을 보여주는 여러 기독교 공동체들을 보아 왔지만 동광원 같은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이제 우리는 동광원을 새롭게 보아야 한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 동광원이 세계적일 수 있는 것은 바로 예수님이 거기에 계시기 때문이다.

사순절 기간을 맞이하여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치신 그리스도를 묵상해 보면서, 그의 자취를 따르기 위해 생사를 걸었던 동광원 사람들의 ‘정절가’를 한번 불러본다.


황야에 핀 국화송이

네 정절이 향기롭다

꽃이 다진 가을날에

너 홀로만 피었구나

임께 바칠 굳은 절개

나도 함께 피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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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일원: 광주 직할시 서구 봉선동 132번지 전화 062) 652-0596


출처: 복음과 상황 1994년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