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마 음 / 정목일

샘물 퐁퐁 2010. 12. 30. 14:55

 

 

     마 음 

 

                                                                   정목일 


이 세상에 가장 난해하고 알 수 없는 말이 있다면 ‘마음’이 아닐까.

가장 친숙하고 다정한 말이면서도 가장 낯설고 엉뚱한 말이다.
가장 가까운 말이면서도 가장 먼 말이다.
알 듯하면서 막막한 말이다.
어디 있는지 모르면서 인간을 지배하고, 보이지 않으면서 삶의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다.
형체도 없으면서 가득 차 있고, 수시로 변하니 알 수가 없다.

마음은 어디에 있을까.
숨쉬는 심장에 있을까, 아니면 생각하는 뇌에 있을까?
실체일 듯하지만 증명할 수 없고 논리나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다.

마음은 영혼의 거울인가. 생각의 분수일까.
감정을 담은 그릇일까. 존재의 그림자일까.
마음을 들여다보라고 말하지만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실재이지 부재인지 알 수가 없다.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이 객관적인 내가 주관적인 자신을 보는 것인지,
또한 나는 누구인지,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 것인지…….
생각은 꼬리를 물고 명상인지 잡념인지 화두인지 모를 깊은 안개 속에 빠져버리게 한다.

‘우리가 매일 수염을 깎듯이 마음도 매일 다듬지 않으면 안 된다.
좋은 뜻을 가졌다 해서 그것이 늘 우리 마음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늘 마음 속에 새기며 되씹어야 한다.

루소의 말이다. 마음도 다듬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음 청소랄까 정화라고 할까.
흩어진 마음을 정리하고 더렵혀진 마음을 씻어내야 한다는 말이다.

마음은 어디엔가 있어서 인간의 삶을 좌우한다.
희비애락을 불러오고 그 속에서 벗어날 수 없게 한다.

20여 년 전, 나는 양산 통도사에서 월하(月下 불교 조계종 종정 지냄) 스님을 만난 적이 있다.
월하 스님은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하라”고 하셨다.
일시적인 옷에 불과한 육체에 신경을 쓰지 말고 영원한 마음을 갈고 닦는데 힘쓰라고

말씀하셨다.
육체는 한시적인 옷과 같아서 소멸하고 말지만 마음은 영원하다고 하셨다.

인도의 명상가 슈리 안나말라이 스와니의 생각은 다르다.
그의 『마음은 없다』라는 책을 읽어보았다.

‘마음은 하나의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그것을 붙잡아 제어하려고 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입니다.
마음은 실체가 없는 하나의 그림자이며,
그대가 어디로 가든 그대 곁으로 따라올 것입니다.
그것을 없애거나 제어하려고 노력하더라도,
그것을 제어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 한 성공할 수 없습니다.

스와니는 “진아(眞我), 깨달음(self-realisation)이 일어날 때는
마음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깨달음은 마음이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해하고 알 때 일어난다고 한다.
마음이라 부르는 무상한 그림자의 실재성과 실체성에 대한
그릇된 관념을 버리는 것이 깨달음이라고 말한다.

나는 마음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 그의 말에 따르면,
자기가 몸과 마음에 갇힌 유한하고 한시적인 하나의 개체라는 것은
자신이 만들어 가진 환상이며 착각에 불과하다고 한다.
마음이란 만물에서 나온 것으로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 본래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깨달음이나 구원이란 자기가 개체 ‘아무개’라는 고정관념에서 깨어나는 것이라 한다.

나는 정말 알 수 없다. 마음을 닦으라는 분이 있고,
“마음은 없다. 마음을 버리는 것이 곧 깨달음이다.
자기라는 한정된 몸과 마음으로부터 벗어나야 영원을 얻게 된다”고 하는 분이 있으니

알 수가 없다.

구도자들은 개체를 벗어나라 하고, 태어나기 이전 본래의 마음을 가지라고 한다.
시간과 공간에 얽매인 존재이면서도 그것으로부터 초월하라고 주문한다.

생각할수록 알 수 없는 게 마음임을 느낀다.
자신의 마음을 알지 못하면서 어떻게 타인의 마음을 알 수 있으랴.
마음이란 과연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다만 관념이고 인식일 뿐인가, 없는 것이며 허공인 것인가.
나는 알 수 없다.

마음을 닦는다는 것, 마음 공부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명상과 수도란 도대체 무엇인가.
결국 마음을 버림으로써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마음을 닦으라.
‘마음을 버리라.

마음이 있고 없고를 알지 못해도 언제나 내 속에 머물고 있다.
마음먹기에 따라 인생과 삶이 달라진다.
마음을 버리기도 깨달음을 얻기도 어려운 것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나.

마음에 묻은 때와 먼지를 닦아내고 싶다.
마음을 버리면 ‘존재’마저 사라질 것 같아 허전하다.
영원을 얻기 위해 찰나를 버려야만 할까.
마음을 버리면 마음이 없어지고, 찰나를 버리면 영원을 얻는 것일까.

깨달은 이들은 얘기하려 하겠지.
희비애락 같은 것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으며,
마음이란 관념을 갖고 있었기에 생기는 헛된 것이라고…….
마음은 환상에 지나지 않고, 관념의 그림자에 불과하며,
인생을 구속시키는 망상이라고 할 테지.
마음을 통해서 본다고 하는데, 그것은 이미 과거라고 할 테지.

나도 말하고 싶다. 마음을 버리자고 하는데,
애당초 없는 것이라면 어째서 인간의 삶을 좌우하는가.
‘마음은 없다’라고 하는 것은 결국 마음을 의식하는 것이며,
마음으로부터 벗어나 대자유와 평화를 얻으려는 게 아닌가.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과연 마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존재인가.

마음은 애물단지일 수도 보물상자일 수도 있다.
애당초 없는 것이라 여긴다 해도 정이 들어서 버릴 수 없다.
깨달음을 얻을 수 없을지언정 마음을 놓치고 싶지 않다.
마음과 벗하며 살 수밖에 없다.

마음을 버리는 일이 깨달음인가.
마음을 깨끗이 닦으면 투명해져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될지 모른다.
돌아가는 날엔 누구나 저절로 마음을 놓아버리지 않겠는가.

‘마음’을 일시적인 구속이나 관념이나 망상이라고 생각하는 자체가 편견에 불과하지 않을까.
‘마음’은 소유 혹은 무소유의 관념이나 대상이 아닐 듯하다.
개체가 지닌 우주이며 영원의 통로가 아닐까 한다.
그것은 보이진 않지만 호흡처럼 실존하는 상태가 아닐까.

알 수 없다.
아무것도 모른다.
나는 마음을 갖고 있으며, 그 마음을 모른다는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