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오래된 친구 - 이향아

샘물 퐁퐁 2010. 10. 16. 07:51

 

  

  

오래된 친구

                                                                                      이향아

 

                   오래된 친구는 늘 신던 신발처럼 편하다. 그는 있는 듯 없는 듯, 그림자처럼 내 옆에 있다. 나는 오래된

친구의 음성을 알고 아무렇게나 내둘러 쓴 그의 글씨를 읽을 수 있으며, 여러 사람의 발자국 소리 가운데

그의 것을 구별할 수 있다. 나는 내 친구가 좋아하는 노래 제목과 꽃 이름과 그 유래에 대해서 알고 있으며,

그가 선택할 만한 소지품의 스타일과 색깔, 좋아하는 이성의 프로필에 대해서도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친구 앞에서 갑자기 마음이 동하여 별 깊은 생각도 없이 이상한 짓을 했을 때도 친구는 놀라지 않고 나를

위로할 것이다.'왜 그러느냐, 미쳤느냐.'고 화를 내지 않음은 물론 이유를 따지지도 않을 것이다.

그가 나보다도 먼저 알고 나보다도 먼저 느끼며 나보다 먼저 이해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래 되어서
서로의 버릇을 안다.그가 지금 후회하고 있는지, 염치가 없고 쑥스러워서 내게 소식을 전하지 못하는지
어떤지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서로 이해할 수 있다.내가 그보다도 먼저 알고 그보다도 먼저 느끼며 그보다
먼저 이해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그의 앞에서 내가 아무 짓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어느 누구 앞에서보다도
내 오랜 친구 앞에서만은 의젓해지고 싶다. 우리 사이의 우정이 소중하듯이 우리 사이의 신뢰와 예절 또한
소중한 것이니까. 우리 사이의 세월과 추억이 아름답듯이 우리 사이로 다가오는 내일과 약속이 소중한
것이니까. 나는 내 친구에게 나를 바닥까지 들키지 않으려고 내 속으로는 무진 힘을 쓰는 편이다.

오래된 친구가 있지만 나는 또 날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지 않을 수가 없다. 새로 만나는 사람들 중에는
놀랄만한 향기를 지닌 사람도 있다. 새 친구의 그 향기도 하루 이틀에 고인 것은 아닐 것이다. 반생을 넘게
살아오는 동안 키가 자라고 뼈가 굵어지듯이 인격으로 정착된 향기이겠거니 나는 생각한다.

나는 오래된 친구를 사랑하듯이, 새로운 친구와의 만남과 그 친구에게서 풍기는 향내에 혹하곤 한다.
내게도 그런 향기가 있을까 의심하면서 나는 그에게 접근하곤 한다. "우리가 지금 새로 사귀어도 친해

질 수 있을까요?" 나는 묻는다. "그럼요. 우리가 지금 만났다는 그것으로 우리는 이미 그렇게 된 것입니다.
아직도 만나지 못한 사람도 많이 있으니까요.˝ 그가 대답한다.

"우리가 어쩌다가 만났을까요?" 나는 어리석은 질문임을 깨닫고 이내 후회하지만 "이것도 작은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싶어요." 그는 조용히 말한다.'운명.' 친구의 조용한 음성에 실린 운명이라는 말에 내 가슴은 뛴다.
그러나 새로 만난 친구의 향내에 도취해서, 이미 내 육신처럼 익숙해져버린 오래된 친구에게 무심해진다는

것은 슬픈일이다.오래된 친구에게서는 향내를 맡을 수 없는 것이 보통이지만 그것은 향내가 없기 때문
이 아니라 내가 이미 오래 전에 그 향내에 동화되었기 때문이다.

거기 길이 들어서 내 것인지 그의 것인지 구별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오래 된 친구의 우정처럼
믿음직

스러운 것은 없다. 우리들이 마주 앉아 오래 되어 향기로운 술을 마시는 저녁은 아무런 말도 없이 시간이

흐를지라도 참으로 호화로운 밤이 깊을 것이다.

눈만 마주쳐도 감정이 통하고 걸음걸이만 보아도 진심을 읽을 수 있는, 오래 사귄 친구를 몇 사람
가지고  

있다면 세상의 어떤 보배를 가진 것보다 부유할 것이다.

 

                   출처: http://blog.daum.net/hynlee67/17944743   꿈꾸는 정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