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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바람 한 줄기, 구름 한 점, 물 한 모금의 단상 斷想

 

 

             바람 한 줄기, 구름 한 점, 물 한 모금의 단상 斷想    

                                                                       흐르는 샘물 / 2003년10월  빨간 단풍이 물드는 어느 날에

 

학창시절, 폭염이 한창인 여름에 나는 병영에 입소하여 한 달간의 군사훈련을 받고 있었다. 그 때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 가장 소박한 그러나 나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바람과 구름과 물의 고마움을 알게 되었다.

 

한 낮 쨍쨍 내려 쬐는 태양, 한창 달구어진 땅은 행진하는 대열로 뿌연 먼지를 일으키고 조금 전에 마신 물은 이내 얼굴에 목에 땀방울 되어 흐른다. 철모와 탄띠, 한 쪽엔 가방, 한 쪽엔 소총을 메고 오후 수업을 위해 거의 뛰다시피 행군으로 달려와 야전 교장 땅바닥에 앉아 가뿐 숨을 몰아쉬며 잠시 휴식시간을 갖는다. 동료들의 몸은 후끈 달아올라 뜨거운 숨과 열기를 내뿜는 것이 마치 한증막 속에 있는 것 같았다.

땡볕 쬐는 황량한 허허벌판, 초등학교 어린이 키만한 측백엽 나무만이 드믄 드문 서있는 곳.

십 분간 휴식!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모두들 나무 그늘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자리다툼까지 일어난다. 나도 질세라 재빠르게 한자릴 잡았다. 밀고 밀리고. 한 점의 그늘을 위해...

그런데 이 것만으론 충분치가 않다. 여전히 뜨겁다. 때마침 조각 구름이 태양의 얼굴을 슬그머니 가려준다. 아, 좋다. 아무런 바람 한 점 없는 여기에 바람이라도 불어줬으면... 그때 우리의 사정을 아는지 한줄기 바람이 스치며 지나가 준다. 살 것 같다. 너무도 고마운 바람이다. 그 때 누군가의 입에서 살그머니 노래가 흘러 나온다.

“산위에서 부는 바람 고마운 바람 그 바람은 좋은 바람 고마운 바람

산위에 나무꾼이 나무를 할 때 이~마에 흐른 땀을 씻어 준대요.“

하나 씩 둘 씩 이내 모두들 따라 부른다. 그 날 이후 나는 구름의 고마움, 바람의 소중함을 난생 처음으로 느꼈다.

 

훈련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이제는 철모에 소총, 배낭까지 맨 완전군장을 하고 오랜 동안 행군을 하는 훈련이었다. 하루 종일 걸으니 발바닥은 다 부르트고 까지고 이미 수통의 물은 떨어진지 오래고 입안은 마르고 혀까지도 말라 까실까실 해지고 목구멍은 타들어가고 길옆 웅덩이라도 보면 당장 달려가 그 물이라도 마시고 싶은 심정이었다. 소낙비라도 흠뻑 내려 줬으면... 그러면 빗물이라도 마실 텐데... 온 몸은 땀과 먼지로 뒤범벅에 젖고 마르고 찌들어 땀도 나올 것 없어 군복 여기저기에 희뿌여케 소금기가 얼룩져 말라 붙었다. 온통 머리 속엔 물! 물! 물! 아, 이 자리에 쓰러져 쉬고 싶다. 하염없이 걸을 뿐이다. 이젠 아무런 생각도 없이...너무나 고통스러웠다.

인가가 있는 동네 옆을 지난다. 개가 처마 밑 그늘, 시원한 땅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 잠자고 있다. 개를 보면서 내가 저 개가 됬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이 간절했다. 그 개가 너무나 부러웠다. 이래서 개 팔자 상팔자인가 보다. 그 때, 동네 아낙네들이 양동이에 물을 들고 나와 바가지에 퍼 행군하는 동료들에게 물을 준다. 벌컥 벌컥 정신없이 마셔 댄다. 시원한 물줄기가 목구멍에서 뱃속까지 흘러내려, 닿는 곳마다 마르고 시들었던 세포들은 이내 다시 깨어난다. 환호성을 부른다. 온몸은 다시 생기와 힘을 얻는다. 정신이 든다. 아! 나는 깨달았다. 한 모금 물의 소중함을...

 

산을 넘고 넘어 훈련 상황은 끝나고 늦은 오후, 우리는 기진맥진한 몸을 이끌고 산길을 따라 내려와 인가가 있는 어느 작은 마을에 이르렀다. 그 때 마을 어귀에 시원하게 보이는 아주 큰 나무 그늘에서 쉬게 되었다. 동네에서 물도 얻어 마시고 한참 쉬고 나니 정신이 들었다. 나무를 살펴보게 되었는데, 내 양팔로 두 배반 정도 되는 아름드리 나무였다. 수령 한 오백년 되 보였다. 나무껍질이 너무나도 깨끗해 손톱으로 긁어 보았다. 파란 껍질 부분이 벗겨져 나오는게 아닌가. 나이에 비해 너무나도 젊은 피부에 놀랐다. 청청하고 늘 푸른 나무 그 자체였다. 살펴보니 그 나무는 산에서 내려오는 시냇가에 뿌리를 박고 있었던 것이다. 그 나무는 느티나무처럼 아름다운 모습의 나무였다. 나는 그 모습에 매료되어 그 나무와 같이 되고 싶었다. 경기도 광주 산자락 어느 작은 마을로 기억되는데 그 때 이후로 그 나무는 내 마음에 살며시 들어와 자라게 되었다.

 

많은 시간이 흘렀다.

어떻게 살다보니 한의학의 길로 들어섰는데, 본초를 하다보면 머릿속에 집어넣은 약초들이 바람이 불면 길가의 낙엽 흩날리듯 다 날아가 버리고, 시험을 볼 때면 이게 저거 저게 이것 같은데 구름 속을 거니는 것 같고, 침자리 살을 꼬집듯 외우지만 한지에 먹물 붓으로 쓴 글씨, 빗물에 씻기듯 이내 지워지고 만다. 그런데 어찌하랴. 이렇게 여러 번 해야 돌에 새겨진다나. 어느 하 세월에...

그러나, 어느새 가을, 입문 일 년으로 접어들고 있는데,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의 방 창 밖에는 단풍나무가 푸른 하늘을 향하여 서있고, 아기 손바닥 모양의 단풍으로 빨갛게 빨갛게 물들어 가고 있다.

한 줌의 흙과 하늘의 입김이 만나 사람이 되었고, 땅의 기운과 태양 빛을 담은 수곡정미의 힘은 하늘의 기운을 만나 구름이 되어 비가 되고 이슬이 되어 오장육부를 적시고 생명의 바람은 이를 도와 이리불고 저리불어 돌고 돌아 온몸 곳곳에 미치지 않음이 없으니 이 생명 기운의 운행, 이 몸 텅 빈 공간을 운행하는 우주 자연 만물과 다름이 없어라.

한의학의 원리 조금은 알 듯 말 듯, 아직은 한의사의 길을 가는 초년생이지만, 이젠 모든 자연물들이 한걸음 성큼 다가와 나와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삶의 한가운데 잠시 정신을 차리고 푸른 하늘에 흰 구름을 볼 때면, 산 계곡을 흐르는 맑은 시냇물을 마실 때면, 창 밖의 나무 잎새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지나가는 바람을 보노라면, 문득 그 때의 그 감동은 여전히 살아있어 지금도 그 나무는 변함없이 내안에서 생명으로 자라가고 있음을 느낀다.

 

어느 교수님 강의 중 내 마음에 새롭게 다가온 한마디.

“나무는 나무 스스로가 자라는 것이 아니라 물이 나무를 자라게 한다.”  그렇다. 나에게 패러다임의 전환을 갖게 해 주었다.

물이 만물에 생명을 주듯이 그 때 그 한 모금의 물이 되고 싶다. 물의 성품을 닮고 싶다.

 

“때론 우물같이 잔잔하고 고요하게

샘물처럼 언제나 늘 새롭게

시냇물처럼 생명력 있는 역동성을

강물같이 순리를 따라 주위의 모든 생명을 풍요롭게

바다와 같이 넓은 마음으로“

 

그래, 지금 내 안에는 한 그루의 나무가 자라고 있다. 한 줄기 시냇물이 흐르고 있다.

도란도란. 졸졸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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