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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행복으로 이끄는 성인들

[스크랩] 놓아 버리는 것을 배우기

놓아 버리는 것을 배우기



주의 깊게 살펴보면, 우리에게 불행을 가져오는 한가지, 그리고 단 한가지요인을 알아 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집착이다. 집착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특정한 것, 어떤 특정한 사람이 없다면 우리가 행복해 질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일어나는 감정적인 매달림이다.

 

- 안소니 드 멜로



“영이 가난한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한가, 그들은 하늘나라를 차지할 것이다.” 이 말씀으로 예수님은 산상수훈의 서언이며 그분의 기본적인 가르침의 정수인 진복팔단을 시작한다. 수를 셀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이 “진복팔단”에 몰입하여 영적인 가난의 행복을 얻기 위하여 실제로 얼마나 가난해야 하는지, 아니면 더 정확하게 표현해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어느 정도의 사유재산을 허락하는지 알기 위해 고심해 왔다. 그러나 예수님이 무슨 생각을 했든 간에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하다. 즉 가난에 관한 한 그분의 의도는 현대 상품문화의 정신과 결코 화해하기 힘들다는 점이다.

 

사회는 우리를 유혹의 두터운 구름으로 둘러싸고 있다. 어딜 가든지 우리는 행복이 바로 코앞에 있다고, 행복은 더 많이 가지는 것이며 더 좋은 것이나 더 새 것을 가지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회에 직면하게 된다. 아메리카 자본주의의 태조들은 물론 이 신경을 정착시켰다. 록펠러는 무엇이 그를 행복하게 하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1달라 더 가지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미국의 경제는 그렇게 무제한의 욕망 위에 세워진다. 비극의 9/11사건이 일어난 후 많은 사람들이 슬픔에 경악하고 있을 때, 그래서 소비에 대한 맛조차 잃어버린 것처럼 보였을 때, 개인적으로 부시대통령은 사람들에게 일어나 쇼핑하러 가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러한 특별 격려도 사실 필요가 없다. 소비를 부추기는 온갖 광고들은 어느 잡지를 보아도 쉽게 나타난다. 우리는 꿈에서도 이런 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우리가 움켜쥐는 것은 재물만이 아니다. 우리의 안전, 자기이미지, “지배하려는” 욕구, 옳다고 생각하는 지나친 확신 등등. 우리는 실제의 우리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는 욕구, 존경받고 싶어하는 욕구를 채우기 위해 값을 지불한다. 또 우리의 비참함에도 매달린다. 상처, 수치스러운 기억, 미래에 대한 불안을 떨쳐버리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이 모든 것을 놓아버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진복팔단의 행복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그것은 오래된 잘못과 갚지 못한 빚들의 정신적인 기록부를 지우겠다는 결심, 즉 용서의 행위로부터 시작된다. 우리가 마음대로 다스릴 수 없는 상황들을 평온하게 받아들이고 모든 것이 다 완전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으로써 시작될 수 있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을 인정하고 그대로 받아들이게 될 때에 놓아버리는 것은 감사의 표현으로, 가진 모든 것에 대한 고마움과 다른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빚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이상적으로 생각하자면, 집착을 놓아버리고 남는 것은 어떤 가난의 상태이다. 그 상태를 비움, 자유, 단순함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성인들은 바로 그 가난의 상태에서 행복으로 가는 길을 찾은 사람들이다.



집착이라는 갈구리


탐욕스러운 정신은 매우 오래된 현상이다. 사막의 교부들은 그것을 사악한 정신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교부는 “슬픔의 악마”라고 표현하면서, “이 악마는 특히 우리가 기울어지고 있다고 보여지는 곳에 올가미를 쳐 놓고 슬픔을 만들어 낸다”고 했다. 사막으로 간 수많은 사람들은 부분적으로 무엇보다도 이 악마로부터 도망가고자 했다. 그들은 단지 남는 재산을 처리하는 것이 이 악마로부터 벗어나는 해결책이라고 보지 않았다. 더 깊은 내적인 회심 없이 외적으로 가난해지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라고 여겼다. 모세원장으로 알려진 수도승에 의하면, “금은보화나 토지를 내놓은 사람들이 칼, 연필, 핀 하나에 흔들린다.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때문에 모든 재산을 포기했지만, 작은 것들에 대한 오랜 욕심을 그냥 갖고 있어서 순식간에 평온함을 잃어버린다.” 그는 한때 어부였던 베드로 성인의 모습을 보고 비웃는다, “주님,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따랐습니다. 이제 우리는 무엇을 받게 될까요?” 모세원장은 이렇게 표현한다, “제자들은 다 낡아버린 낚시망 밖에 버린 것이 없었다.”

 

소유물을 없애면서 사막의 수도자들은 마음 속에서 집착의 갈구리를 떼어버리려고 애썼다. 그들은 가난 그 자체를 추구한 것이 아니었다. 가난은 다만 또다른 “교환의 도구”였으며, “마음의 순결”이라는 궁극적인 목적을 위한 방법에 불과했다. 단식, 기도, 가난 같은 고행을 통하여 사막의 은수자들은 “가시덤불과 잡초”(분노, 탐욕, 욕망, 질투 등)를 뿌리 채 뽑고자 했다. 이런 것들은 마음을 질식시켜서 사랑하는 능력을 죽여버리기 때문이다. 어떤 은수자들은 극단적인 행동까지 했다. 세라피온이라는 은수자는 성서책들을 팔아 가난한 이들을 돕기도 했다. 그는 “나는 모든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라고 가르쳐 주는 책을 팔았다”고 말한다. 안토니오 성인은 이렇게 주장한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가진 것에 만족하지 않는 사람들, 더 많은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영혼을 흔들고 더 나쁜 생각과 착각을 일으키는 욕망의 노예가 된다. 욕망은 모든 것이 나쁘므로 새롭고 더 좋은 것을 소유해야 한다고 부추긴다.”

 

행복에 이르는 길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다 갖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갖고 있는 것을 갈망하는 데에 있다(더 좋은 표현은 만족하는 데에). 이 만족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많은 것을 놓는 것 못지 않게, 현재 부족한 것을 채워야만 행복하다는 착각을 버리는 데에서 발견된다. 많은 성인들은 실제로 가난을 받아 들였지만, 단순히 세상의 재화를 거절하는 것 그 이상을 실천했다. 그들은 예수님이 말했던 것처럼 좀이나 녹이 들어 올 수 없는 곳에 재화를 쌓는 전혀 다른 가치관으로 살았다. 이렇게 노력하면서 그들은 다른 것들­재화와 소유, 물론 가짜 야심, 욕망, 그리고 소소한 감정들­의 무게가 줄어드는 것을 발견하였다.

 

“들에 핀 백합을 보라”고 예수님은 말한다. “그것들은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이 꽃 한 송이만큼 화려하게 차려입지 못했다”(마태오 6,28-29). 복음서는 신뢰와 철저한 단출함에 대한 권고를 여러 곳에서 표현한다. 백합의 모형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다른 모형이 여전히 남아 있다.



가난한 사람


역사에서 앗씨시의 프란치스꼬는 특별한 지위를 누리고 있다. 그의 삶은 그리스도를 가장 많이 닮았다고 여겨질 뿐만 아니라, 교회의 테두리를 넘어 보편적으로 추앙을 받는 몇 안 되는 성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여기에 한가지 특징을 더 첨가한다면, 그는 분명히 즐거움을 그의 성인됨의 특징으로 표현하고 있다. 구미오의 사나운 늑대를 길들인 것, 참새들에게 설교하고, “형님인 태양과 누이 달” 같은 찬가를 노래한 것, 그밖에 프란치스꼬의 많은 저술과 이야기들은 한결같이 그의 행복한 모습, 하느님의 선하심에 대한 찬양, 창조세계의 아름다움에 대한 기쁨을 보여준다. 그러나 하느님을 섬기며 기뻐하는 그의 모습은 집착으로부터 계속 벗어나면서 가능했다는 점 또한 분명하다. 프란치스꼬는 무엇보다도 집착을 놓아버리는 예술의 달인이었다.

 

프란치스꼬는 늘 까다로운 사람이었다. 그는 아름다움에 민감했고, 추함에 대해서는 혐오를 느꼈다. 그러나 어느 날 길에서 그는 나병환자와 마주쳤다. 그 불쌍한 사람의 얼굴은 무섭게 일그러져 있었고, 냄새를 풍겼다. 프란치스꼬는 말에서 내려와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동전 몇 닢을 그에게 주었다. 그리고는 어떤 충동으로 무릎을 꿇고 나서 나환자의 참혹한 손에 입을 맞추었다. 그것은 전환점이었다. 그 만남으로부터 프란치스꼬의 삶은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가족과 사회의 가치관과 반대의 방향이었다. 나환자에게 입맞춤으로써 프라치스꼬는 죽음과 질병에 대한 두려움을 떨쳤을 뿐만 아니라 지위, 안전, 세상적인 성공에 기반을 둔 그의 모든 정체성을 놓아 버렸다.

 

프란치스꼬와 그의 동반자들은 바깥이나 아주 초라한 움막 같은 곳에서 살았다. 그들은 일용할 양식을 얻기 위하여 들에서 농부들과 함께 일했다. 일이 없을 때, 그들은 구걸하거나 굶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병자들을 돌보고, 슬퍼하는 이들을 위로했으며,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가르쳤다.

프란치스꼬의 매력은 무엇이었는가? 추종자 마쎄오형제도 익살스럽게 이런 질문을 했다, “왜 당신입니까? 왜 사람들과 세상 모두가 당신을 따르고 있는 겁니까? 모든 사람들이 왜 당신을 보고 싶어하고, 듣고자 하며, 당신에게 복종하는 겁니까? 당신은 잘 생기지도 않았고, 많이 배운 것도 아니고, 지혜도 출중하지 않고, 귀족도 아닌데, 세상이 왜 다 당신을 쫓아다니는 겁니까?”

 

프란치스꼬는 특유의 겸손함으로 하느님의 영광은 자기 같이 “보잘것없는 종”의 약함에서 더 밝게 빛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대답은 그의 확실한 신뢰성을 표현해 주는 말이었다. 그를 만나는 사람들은 누구나 더 이상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이론으로 훌륭하나 실천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가질 수 없었던 것이다. 세속적인 교황 인노센트 3세조차 프란치스꼬가 말하는 새로운 수도회를 인준할 수밖에 없다고 느꼈다. 교황의 한 측근 추기경은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이 사람은 우리가 복음에 따라 살기를 원할 따름이다. 이제 그런 삶이 인간의 능력 밖이라고 말하면, 우리가 복음서를 따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선포하는 셈이 된다. 그러면 복음서의 저자인 그리스도를 모독하는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 된다.”

 

이런 성실함과 신뢰성말고 또 다른 측면이 있다. 프란치스꼬의 모습은 도덕성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깊은 매력이 흘러 넘친다. 그는 자유와 기쁨의 영이 충만했다. 사람들은 그 옆에 가까이 있고 싶어했고, 즐거움의 비밀을 알고 싶어했다. 프란치스꼬의 첫 번째 전기작가인 셀라노의 토마스는 이렇게 묘사했다, “그 삶의 순결함, 마음의 깨끗함, 하느님에 대한 사랑, 형제적 애덕, 철저한 순명, 평온한 승복, 천사 같은 표정은 얼마나 아름답고 빛났으며 영광스러웠든가!”

 

프란치스꼬와 가난의 만남은 확실히 극단적이었다. 그가 실천한 가난은 잘 정돈된 수도원의 가난도 아니고, 방랑자의 낭만적인 가난도 아니었다. 그의 가난은 참으로 가난한 이의 불확실하고 부서지기 쉬운 모습이었다. 그는 소유가 하느님과 이웃사랑에 매우 위험하고 큰 장애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현세 재화에 대한 갈망이 없다고 했다.

 

프란치스꼬는 세상의 관점과 가치관을 전도시켰다. 다른 사람들이 안전을 발견하는 곳에서 그는 오직 구속만을 보았을 뿐이다. 다른 이들에겐 성공으로 여겨지는 것이 그에게는 하느님과 이웃사랑에 대한 장애물이요, 다툼만 일으키는 길이었다. 뿐만 아니라, 프란치스꼬는 재물이나 소유만 놓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사회 속에서 명성과 지위, 자신의 변덕스러움, 분노, 자만심, 그리고 야심들­한마디로 그의 사랑하는 능력을 가로막는 모든 것들­을 다 포기했다. 그러나 이렇게 놓아 버리는 끝은 무(無)가 아니었다. 오히려 모든 잡동사니로 가득 찼던 그의 마음은 이제 세상이 줄 수 없는 매우 큰 기쁨으로 가득 찼다. 그는 너무나 감사해서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창조주께 그는 이렇게 쓴다, “당신은 사랑이시고 자비이십니다. 당신은 지혜이십니다. 당신은 겸손이시고, 인내입니다. 당신은 아름다움이고, 온유함입니다. 당신은 안전이시고, 내적인 평화입니다. 당신은 기쁨이고, 우리의 희망이요 기쁨이십니다... 위대하시고 훌륭하신 주님, 전능하신 하느님, 자비로운 구세주시여.”

 

프란치스꼬의 모범을 따라 우리는 위대한 일들을 하고 영웅적 행동을 수행하며 삶의 모든 갈등들을 나환자에게 한 번 키스하고 해결해 보는 꿈을 꾼다. 그러나 도로시 데이가 쓴 것처럼, “때때로 그저 단 한 걸음만으로 될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며 더 많이 보게 되면서 나는 삶이 수많은 걸음들로 이루어지며 그것도 거대한 한 걸음이 아니라, 매우 작은 사건들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는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씩이나 나환자에게 의식적으로 키스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프란치스꼬의 철저한 이탈은 아마도 극소수의 사람들과 관련된 이야기 일 것이다. 그러나 이탈이 작은 걸음들에 의해서든, 큰 걸음에 의해서든 간에 놓아 버린다는 것은 단순히 빈손이 더 낫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가장 핵심은 손이 닿을 수 있는 모든 것에 매달리게 될 때, 우리가 지불해야 할 값이 엄청나게 크다는 사실이다. 이탈하는 법을 깨우칠 때까지 세상은 우리에게 헤아릴 수 없는 올가미와 장애물을 던져 우리의 행복을 방해할 것이다. 도전은 있는 모습대로의 세상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불투명하게 만드는 우리 안의 움켜쥐는 성향을 놓아버리는 것이다. 그것이 이루어질 때 토마스 아 캠피스가 「준주성범」에서 말했듯이, “모든 창조된 것은 우리에게 생명의 거울이요, 거룩한 가르침의 책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선하심을 반영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보잘 것 없고 추하다 해도, 이 세상에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쉴 수 없는 마음들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집착과 욕망이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고 혼란스럽게 한다면, 왜 우리는 그렇게 그것들에 매달리는가? 많은 사람들이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고 애썼지만, 히포의 성 어거스틴 만큼 깊게 고심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어거스틴은 행복에의 염원이 인간존재를 규정하는 특징들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은 -잘못되고 해악한 것이라 해도­ 행복을 목표로 삼는다. 그러나 우리는 행복을 얻는 길에 관하여 잘못 인도되고 있다. 우리는 피조물로부터 그것들이 감당할 수 있는 것 이상을 원한다. 결과는 슬픔이고, 두려움이며, 불안이다. 어거스틴은 이 문제를 하느님과 연결시켜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당신은 당신을 위하여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은 당신 안에 쉴 때까지 쉴 수가 없습니다.”

 

어거스틴은 자신의 삶에서 중요한 문제가 행복에 대한 갈망, 그리고 충동적인 욕망과 감정에 억매여 나타나는 무력감 사이의 충돌과 대립이라고 깨달았다. 이러한 갈등은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게 고통을 일으킨다고 생각했다. 그는 문제가 통제되지 않는 성욕보다 더 깊은 것이며, “강한 욕망의 가시덤불”이라는 표현을 자주 암시적으로 했다. 그는 한 유명한 에피소드를 꽤 오랫동안 다루면서 어렸을 때 이웃에서 배나무서리를 할 때 느꼈던 감정을 표현한다. 그것은 굶주림이나 필요에 의한 행동이 아니라, 순전히 일부러 제 마음대로 하고 싶은 욕구의 발산이었다는 것이다. 이 경험은 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의 불순종을 연상시킨다. 어거스틴이 경험한 것도 똑같은 경우로서 인간죄악의 전형적인 표현이었다. 그는 이것을 우리의 의지를 감금하여 꼼짝달싹 못하게 하는 끈질기고 강력한 욕망이라고 일컫는다.

 

어거스틴은 인간의 원죄교의를 정의하는데 있어 막대한 책임이 있다. 그는 이 원리를 애정의 무질서라고 표현한다. 우리가 너무나 많이 사랑해서가 아니라, 무절제하게 사랑하는 것이 문제라고 한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의 참다운 가치에 걸맞게 그것들을 사랑하지 못하고 있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이것이 바로 추락한 인간성의 기본조건이다. 단지 “탐욕”이 우리를 길에서 빗나가게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자신이 우리의 작은 소우주의 중심이라고 상상하면서 선한 것들­사랑, 아름다움, 진리­에 대한 갈망에서조차 우리는 잘못 인도되고 있다. 우리의 이기심은 굶주림을 폭식으로, 사랑을 색욕으로, 애정을 탐욕스러운 소유욕으로 변질시키고 있는 것이다.

 

어거스틴의 이러한 갈등과 긴장은 어느 날 정원을 거닐고 있을 때 위기에 봉착했다. 「고백록」에서 그는 이 경험을 승복의 초대, 놓아버림의 부르심이라고 표현했다. 그것은 사람이나 사물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자신의 죄에 대한 집착이었고, 그것이 그를 혼란스럽게 한 것이었다. “나는 그저 하찮은 것들에 매달려 있었다. 나의 모든 오래된 집착들, 가장 무가치한 어리석음에... 이것들이 나의 육신의 옷을 낚아채면서 속삭였다, ‘넌 우리를 버릴 것이니? 그러면 이 순간부터 우리는 절대로 영원히 너와 함께 하지 않을 것이야?’”

 

그가 이 씨름에 한창 빠져 있을 때, “자, 들고 읽으세요”라고 말하는 한 아이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성서가 손에 쥐어졌다. 아무 곳이나 펼쳤을 때, 바로 서간의 구절을 발견했다. “향연이나 음주가 아니라, 욕망과 방종이 아니라, 싸움과 경쟁이 아니라,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갑옷을 입으십시오. 본능과 본능이 주는 맛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지 마십시오.”

 

어거스틴의 전환은 재산, 사람, 혹은 “세상”을 포기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낡은 자아, 게걸스러운 자기탐욕의 깊은 구렁을 놓아버림으로써 회심을 이루었다. 오직 이 길을 통하여 그는 이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을 소유하고 지배하며 소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들의 참다운 가치를 알아보고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모든 것 위에 하느님을 사랑하면서 그는 자신의 무절제한 사랑의 굴레에서 해방되었다. 이제 세상은 더 이상 올무가 아니었다. 모든 피조물을 찬양하고 감사할 수 있게 되었다. “행복이란 당신 안에서, 당신을 위하여, 당신 때문에,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행복이며 다른 행복은 없습니다.”



선물의 교환


우리는 소유문화의 유혹적인 부추김에 저항하기 위하여 광야로 나갈 필요가 없다. 프란치스꼬 처럼 자유를 얻기 위하여 벗을 필요도 없다. 그러나 성인들의 행복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혹은 부족한 것에 근거하여 우리 자신을 보면서, 진정으로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 이해하기 위하여 조금씩 한결같이 나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 움직임에서 이탈의 도전은 단지 우리자신의 물질적 집착이나 분명한 잘못과 죄악을 놓아버리는 것만이 아니다. 세상은 불행한 사람들로 가득하다. 후회에 짓눌린 사람들, 과거상처의 기억, 삶의 모든 슬픔과 불공평의 짐에 허덕이는 사람들이다. 오랫동안 우리는 이런 짐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그것을 벗어버리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래서 복음서의 부자청년처럼 우리는 “슬프게 떠나간다.” 낯선 대안보다 공허한 재물이 더 낫다고 생각하면서...

 

그러나 성인들은 다른 길을 선택했다. 놓아버리는 것, 빈손으로 따르는 것을 택했다. 그들은 우리에게 이탈의 과제를 보여준다. 그것은 단순히 우리의 물건, 우리의 과거, 슬픔 등 우리가 매달려 있는 것들을 포기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것을 다른 것과 바꾸는 것이다. 한 가지 정체성이나 삶의 조건을 또 다른 종류의 정체성, 삶의 조건으로 바꿔치기 하는 것이다. 이제는 다른 정신의 영향을 받아 다른 목표를 갖고 살아가는 것이다. 놓아버리는 것, 이탈하는 것은 인색한 내핍생활, 영적으로 말하자면 부서질 정도로 단식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우리의 움켜짐, 긴장을 푸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영적인 가난은 어떤 자의적인 생활방식으로 해석될 수 없다. 궁극적으로 영적인 가난이란 우리의 보물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말했듯이, 우리의 보물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도 있을 것이다. 

출처 : 어둠 속에 갇힌 불꽃
글쓴이 : 정중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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