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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행복으로 이끄는 성인들

[스크랩] 깨어 살아가는 것을 배우기

깨어 살아가는 것을 배우기



당신께 간청합니다, 우리를 진정으로 깨어있게 하소서.

 

- 트뮤이스의 세라피온


나의 주님, 생명의 주님이시여, 저의뿌리에 비를 보내주소서.

 

- 제라드 맨리 홉킨스



삶의 슬픔들은 수없이 많다. 그러나 슬픔은 행복의 반대가 아니다. 적어도 슬픔 속에서는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주 문제는 실상 슬픔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 실존에 따라다니는 죽음과 같은 상태, 생기 없음, 무감각의 상태이다. 세상의 속도와 압력, “생존을 위한” 투쟁, 끝없는 광고로 야기되는 불안함, 소비문화의 산만함과 소음­이 모든 것들이 우리를 피곤하게 무기력하게 만들고, 모든 것에 무감각한 상태를 가져온다. 우리의 신체들은 아마 이 모든 것을 견디며 살아 남을 것이다­지금까지 어떤 세대도 오늘날과 같은 긴 수명이나 건강상태를 누린 적이 없다­그러나 우리의 영혼을 갉아먹는 병은 어쩔 것인가.

 

우리는 통근하는 열차 속에서 혹은 쇼핑가에서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이 병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거울에 비쳐지는 우리의 얼굴에서도 자주 발견된다. 그러나 교회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에서도 이 병은 보인다. 종교 자체는 이러한 무기력, 생기 없음에 대해 특별한 면역체를 주지 못한다. 특히 종교생활이 단순히 또 다른 수행과제나 복종해야 할 일련의 규칙들에 불과 할 때에는 더욱 무력한 것이다.

돌보는 양떼에 대하여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그들이 생명을 얻고 또한 풍성하게 얻기 위하여 왔다.” 생명이 풍성한 삶이라는 표현은 행복의 의미를 정의해 주는 한가지 길이다. 그것은 메마르고 속이 빈 삶에 대한 해독제 같은 역할을 해 준다. 공허한 삶은 우리의 “즐거움과 갈망들”에 대한 기억마저 둔하게 만든다. 그러나 수세기 동안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이러한 약속을 죽음 저편에서야 실현되는 것으로 바꿔치기 했으며, 현재에 생명과 행복을 추구하려는 도전과 노력들을 무시해 왔다. 초기 사막의 교부들 중 한 사람인 테오파니스 수도승은 “현재세계에서 생명을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내세에서 생명을 얻을 것이라는 헛된 희망으로 당신 자신을 기만하지 마라”고 경고하였다.

 

2세기의 주교이며 신학자인 이레네우스 성인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하느님의 영광은 인간존재가 충만하게 살아있는 것”이다. 이레네우스는 세상 안의 물질적 실존을 경멸하는 영성에 반대하기 위하여 이런 표현을 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말들은 삶을 일이나 쾌락 혹은 내세주의적 영성으로 축소시키고 안주하는 사람들에게도 도전을 준다. 충만하고 온전하게 살아있는 것­이 목적을 위하여 우리는 창조되었다. 성인들이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듯이 그리스도는 이 목표에 도달하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길을 잃었다.



생명이 넘치는 삶에 대한 끌림


“충만하게 살아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그것은 분명히 단순하게 먹고 숨쉬는 것이 아니다. 또한 미친 듯이 행동에 들떠있는 소란스러움도 아니다. 충만하게 살아있다는 것은 자아의 가장 깊은 부분을 살아내는 것이다. 자아의 가장 깊은 부분을 마음이나 영혼이라고 부른다. 마음이나 영혼은 우리 존재의 중심적이며 내밀한 핵심을 표현하는 말들이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소음과 산만함을 볼 때, 그러한 부분이나 자기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조차 매우 힘든 일이다. 우리는 그저 표면을 미끄러지듯 살고 있다. 신문이나 이웃, 혹은 TV 광고로부터 우리의 역할을 받는다. 이것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며, 무엇이 우리에게 즐거움을 가져다 줄 것인지 말해 준다. 그러나 그 소리들에 더 귀를 기울일수록 우리는 자신들에 대해 더 알 수 없게 된다. 행복이 그렇게나 잡히지 않는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성인들이라고 불리는 남녀들은 다른 길을 걸어간 사람들이다. 그 길은 하느님께 이르는 길이었으며, 또한 동시에 그들의 진정한 자아에 도달하는 길이었다. 그들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는 막대하다. 하지만 안내자로서, 스승으로서, 그들의 권위는 자주 그들에게서 분명하게 보이는 “다름”이라는 그림자 속에 묻혀버린다. 이 다름은 보통사람들에게 도저히 따를 수 없는 것으로 비쳐지고 매력을 별로 주지 않는다. 이처럼 성인들은 완전한 사람들로서 “우리와 같지 않은” 존재들이라고 여겨진다. 성인들의 전통적인 이야기들은 이런 모습을 더 강화시킨다. 그들에게서 인간적인 부분들을 말소시키고 기적이나 내세적인 흔적들을 강조하기 일쑤다.

 

그러나 도로시 데이는 다른 의미를 전해준다. 그는 인스턴트 커피 한잔의 맛을 음미했고, 매우 드문 신선한 빵을 즐겼다. 그는 바닷가의 물결치는 파도를 즐겨 바라보았고, 토요일 오후에는 라디오방송의 오페라 음악에 심취하기도 했다.

토마스 머튼은 성인다움이란 보다 더 풍요로운 인간이 되어 가는 문제라고 보았다. 이것은 “관심을 가지는 것, 고통과 이해, 공감에 대한 능력, 또한 웃음과 재치, 즐거움의 능력, 삶의 선함과 아름다운 것들을 감상하는 능력”을 의미했다. 우리는 이러한 특징들을 근대의 성인들에게서 볼 수 있다. 마더 데레사, 요한23세, 달라이 라마­이 분들은 존재의 담백함을 풍긴다. 앗씨시의 프란치스꼬, 아빌라의 대데레사 에게서도 생명의 현존, 풍성한 생명력을 맛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무기력의 진흙수렁에 빠져 있는 우리들은 행복에 이르는 길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 아마도 막연한 불만족, “삶에는 무언가 다른 것이 더 있을 것”이라는 의구심, 어떤 불안감으로부터 시작할 수도 있다. 물론 이런 질문에 대해 우리문화는 이미 대답을 갖고 있다: 삶에는 무언가 더 있다. 그것도 무한하게 더 있다­더 많은 물건들, 더 많은 쾌락, 더 많은 재미가 있다고 말한다.

 

세상은 헤아릴 수 없는 즐거움과 기분전환 꺼리를 가져다 준다. 그러나 그것들은 우리의 가장 깊은 갈증을 채워 줄 수 없다. 이 사실을 깨닫고 또한 우리의 불안이 그대로 남아있다면, 그 때에 탐구가 시작된다. 탐구는 우리가 삶의 일상 속에 가라앉지 않는다면 누구나 할 수 있다. 탐구의 가능성을 깨닫게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가 일어날 것 같다고 기대하는 것이다. 기대하지 않는 것은 곧 절망에 빠지는 것과 같다.

헨리 데이비드 쏘로우는 “깨어있는 것이 살아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온전히 깨어있는 사람을 아직도 만나지 못했다”고 썼다. 그는 “의식을 갖고 숙고하며 살아가는 것, 삶의 기본적인 사실만 직면하는 것, 그리고 삶이 가르치는 것을 배울 수 있다면, 그래서 죽을 때가 되었을 때 내가 살아있지 못했다는 것을 발견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사막과 같은 뉴잉글랜드에 한동안 칩거하였다.



사막으로 


4세기경, 그리스도교가 로마의 국교로 승인되었을 즈음, 새로운 현상이 나타났다. 이 현상은 후기 로마사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경이감과 매력을 불러 일으켰다. 처음에는 소수의 용감한 남녀선구자들 뿐이었으나, 점차 꽤 많은 사람들이 사막으로 흘러 들어가기 시작하였고, 이어 팔레스타인, 아라비아, 시리아, 이집트의 사람이 살 수 없을 것 같은 지역에까지 확산되었다. 사막에 들어간 이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작은 공동체를 이루었고, 또 다른 사람들은 외따로 떨어진 동굴이나 버려진 폐허에서 살기도 했다. 고독 속에서 그들은 기도와 단식에 전념하였고, 성서묵상, 그리고 단순한 노동을 수행했다.

 

그들이 추구하던 것은 무엇이었나? 많은 대답이 나올 수 있다: 더 사려 깊게 살아가기 위하여, 구원에 이르는 더 좁은 길을 찾기 위하여, 주위의 문화에서 느끼는 무기력함을 극복하기 위하여, 생명의 원천에 닿기 위하여 등등. 그렇다, 이 모든 것들이 답이다. 그런데 한가지 더 놀라운 사실은 이 사막의 순례자들이 갈구하던 것이 결국 행복의 추구와 연결되었다는 점이다.

 

사막의 교부들 가운데 가장 저명한 사람은 안토니오 성인으로서 356년에 105세라는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집트의 부유한 그리스도인 가족에서 태어난 안토니오는 어느 일요일 예수와 부자청년의 이야기를 듣고 극적으로 삶을 변화시켰다. 그는 특히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받을 상이 하늘에 마련되어 있다”고 한 그리스도의 명령에 충격을 받았다. 아마 그 날 교회에 모여있던 다른 사람들도 똑 같은 구절을 들었을 것이나, 안토니오는 진심으로 그 말을 받아들였다. 그는 재빨리 모든 재산을 처분하고 광야로 나갔으며, 아라비아사막에 있는 폐허 요새의 언덕 꼭대기에 정착했다. 그 곳에서 안토니오는 20년을 살았다. 기도, 관상, 그리고 텃밭을 가꾸며 지냈다. 한 철학자가 그를 찾아와 어떻게 “책의 위로” 없이 행복할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 안토니오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의 책은 창조된 자연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읽고 싶을 때마다 내 앞에는 책이 늘 열려 있습니다.”

 

안토니오 성인의 삶은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였던 아타나시오 성인이 쓴 책에 정리 되어 있다. 안토니오 성인이 죽은 후 얼마 되지 않아 쓰여진 「안토니오의 삶」은 성인의 수많은 금욕행위와 시련을 그리고 있다. 굶주림, 갈증, 철야, 또한 사자, 악어, 뱀, 전갈의 위험 등등. 가장 극적인 일화들은 다양한 모습과 위장으로 은밀하게 유혹하는 악마의 끝없는 공격에 맞서는 안토니오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시련 후 안토니오가 오랜 고독의 생활을 끝내고 사람들 앞에 다시 나타났을 때, 사람들은 그의 육체적인 모습에 경탄한다. “그는 운동의 부족으로 뚱뚱해 지지도, 단식과 악마들과의 싸움 때문에 수척해 지지도 않은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안토니오 성인의 내면의 평정은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그의 영혼은 혼란으로부터 자유롭고, 외적인 감각 또한 평온하였으며, 영혼의 기쁨 때문에 그의 얼굴은 즐거웠다. 몸의 움직임을 볼 때에도 영혼의 안정된 상황을 느끼고 인식할 수 있었다.” 점차적으로 그는 수도승들의 공동체에 원장이 되기로 동의했다. 아타나시오에 의하면 “그는 결코 혼란스러워하지 않았다. 그의 영혼은 평온함을 유지하였으며, 절대로 우울하게 보이지 않았고, 마음은 즐거웠다.”

 

사막의 수도자들은 이러한 평정을 무관심이나 활기 없는 상태와 전혀 다른 것이라고 여겼다. 그들은 사람이 더 이상 분노, 두려움, 탐욕, 그리고 자만심의 노예가 되지 않을 때, 참다운 삶을 시작하게 된다고 믿었다. 이러한 모든 욕정들이 제거되면 그 결과는 감정, 느낌의 부재가 아니라, 친절, 온유, 그리고 연민으로 표현되는 균형과 온전함의 상태가 된다. 그것은 한마디로 “영혼의 즐거움”이라고 할 수 있으며, 안토니오의 얼굴에서 확연히 나타난 모습이다.

 

안토니오의 삶은 대중에게 인기를 얻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책으로부터 영적인 영웅주의의 맛을 느꼈다. 그 중에 어거스틴 성인도 있었다. 어거스틴은 후에 히포의 주교가 되었고, 그리스도교 역사에 우뚝 솟은 사람들 중의 하나이다. 「고백록」에서 어거스틴은 그가 회심하기 전날 저녁 한 그리스도인의 방문을 받았고, 그에게서 처음으로 안토니오 성인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술회한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거의 우리가 살고 있는 동시대에 하신 놀라운 일을 듣고 경악했다”고 했다(어거스틴은 안토니오 성인이 죽은 지 2년 후인 354년에 태어났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경탄과 함께 고뇌에 빠졌다. 그리스도교의 논리를 이성적으로 얼마동안 포용했지만, 삶을 새롭게 발견한 확신에 맞추어 변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복음서의 부자청년처럼 그는 “세상의 즐거움을 여전히 붙잡고 포기하는 것을 미루었다. 포기한다면 새로운 다른 행복을 자유롭게 찾아 나설 수 있었지만, 발견은 둘째치고 그 새로운 행복을 찾는 과정자체를 위해서도 나는 모든 인간의 재화와 왕국의 발견을 포기해야 했던 것이다.”

 

어거스틴은 안토니오 성인의 삶이 행복을 추구했던 삶이라고 생각했다. 안토니오는 그 행복을 발견했고, 어거스틴도 그것을 원하고 있었다.

1600년이 지난 오늘 이러한 이야기들이 사람들에게 매혹적이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우리 사회는 자기부정보다는 자기실현을 더 높이 산다. 그래서 전갈들 사이에서 사는 삶에서 얻어지는 행복보다 현재의 “노예살이”가 주는 비참함이 더 좋고 익숙하게 보인다.

 

토마스 머튼도 회심하던 전날 알더스 헉슬리의 책에서 고행생활을 찬양하는 글을 읽고 비슷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고행이라니! 그런 생각은 나하고 전혀 어울리지 않아. 그건 자연의 순리를 매우 괴상하고도 추하게 거스르는 것이고, 불의하고 왜곡된 사회 속에서 미쳐버린 사람의 자학적인 태도에 불과해. 도대체 말도 안 되는 생각이야! 육체의 욕망을 부인하고, 이러한 욕망을 징벌하고, 억제하기 위하여 훈련까지 한다? 오늘날까지도 이런 생각들은 나에게 소름만 끼치게 할 뿐이다.”

 

그러나 고행극기를 말할 때 자기징벌이라는 부정적인 측면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측면들이 분명히 있다. 사막의 수행자들이 고행과 희생을 한 것은 의지를 훈련하기 위해서였고, 영적인 목표에 집중하고 강력하게 초점을 맞추기 위해서였다. 그 목표는 무엇이었는가? 사막의 수행자들이 “세상으로부터” 도피한 것은 실제로 권력, 재산, 쾌락, 그리고 지위에 대한 추구라는 사회적 관습을 거부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마디로 “세속적인 것”에 대한 부정이었다. 세속적인 것이란 실제보다 허상을, 존재하는 것보다 가지는 것을 더 선호하는 문화, 가치관들을 의미한다.

 

초기 수도승들은 무기력으로부터 생명, 활력으로 가는 길을 추구했다. 그들은 단지 물질적 쾌락을 상대하지 않기 위하여, 또 자신들을 징벌하기 위하여 “세상”으로부터 도피한 것이 아니라, 관습, 일상, 그리고 사회적 기대치의 굴레보다 더 깊고 풍요로운 실존에 “깨어있기 위하여” 사막으로 간 것이다. 머튼은 후에 이렇게 말했다, “사막의 교부들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안의 참다운 자아를 추구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하여 교부들은 가짜 자아, 형식적인 자아, ‘세상’ 속에서 사회적인 규약 아래 제조된 자아를 완전히 거부해야 했다. 그들은 알려져 있지 않은 또한 자유롭게 선택하는 하느님의 길을 찾았다. 그 길은 사람들이 앞서 그려놓은 길, 다른 이들로부터 전해 받은 길이 아니었다. 교부들은 어떤 다른 사람이 고정시켜 놓은 ‘주어진’ 하느님이 아니라, 그들 홀로 발견할 수 있는 하느님을 추구하였다.”

그들은 살아있는 것, 깨어있는 것을 배워간 사람들이었다.



자유


자서전「칠층산」에서 머튼은 목적없이 이 세상에 사로잡힌 생활로부터 수도원의 골방에 갇힌 “자유”의 삶을 얻기까지의 여정을 묘사하고 있다. 그는 이 세상의 온갖 쾌락, 흥분, 열정을 다 경험하고 살았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을 환상이라고 하며 거부하였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만일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참으로 진실이라면­행복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단지 모든 것을 움켜쥐고, 모든 것을 보고, 모든 경험을 다 해 보고, 그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라면, 나는 벌써 행복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요람으로부터 지금까지만 해도 나는 영적인 백만장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행복하지 않았다. 머튼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나 자신을 채우면서 나는 오히려 비어 갔다. 움켜쥐면서 나는 모든 것을 잃었다. 쾌락과 즐거움을 게걸스럽게 삼키면서 나는 실망과 분노와 두려움을 느꼈다.”

그리고 고뇌와 혼란으로부터 머튼은 삶에 더 깊은 목적과 존재의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으로 살아 있는 유일한 길은 하느님의 현존과 실제로 가득찬 세상을 발견하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것”임을 점차 깨닫기 시작했다.

 

살아있는 동안 머튼은 이미 영성작가로서 명성과 인기를 누렸다. 1968년에 죽은 후 수십 년이 지났지만 그의 인기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수많은 독자들 중에 극히 소수의 사람들이 그를 따라 수도원에 들어갔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도원에 가지 않은 다른 수많은 사람들은 그의 경험에 동감하고 있다. 그들은 행복을 찾는 여정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길이 충분치 않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충만한 삶으로 초대하는 소리를 듣고 있다. 그 초대는 세상이 정해 놓은 틀을 넘어서는 초대이다.



새벽별


성인들의 행복은 억제와 자기훈련을 더 늘이는 것에 있지 않다. 우리를 놀라게 하고 이끌리게 하는 성인들의 가장 좋은 점은 그들의 짐이 얼마나 무거운가에 있지 않고, 그들의 행동과 태도 속에서 빛나는 “영혼의 기쁨”에 있다. 그들의 무거움이 아니라, 담백함이 우리를 끌어당기는 것이다.

 

사막의 교부들이 남긴 말씀 중에 한 젊은 수도승과 연장자간에 이런 대화가 있다: “로트 원장이 죠셉 원장에게 와서 말했다, ‘아버지! 저는 할 수 있는 만큼 겸손하게 규칙을 지키고 단식, 기도, 묵상, 그리고 관상 속의 침묵을 행했습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한 제 마음 속의 생각을 깨끗이 하려고 애썼습니다. 이제 제가 더 이상 무엇을 해야합니까?’ 연장자는 대답하기 위하여 일어섰고, 하늘을 향하여 손을 뻗쳤다. 그래서 그의 손가락은 마치 열 개의 불이 켜진 등불처럼 보였다. 그는 말했다, ‘그러면 그냥 불 자체로 변해 버리면 어떨까요?’”

 

모든 사람은 사막의 은둔소에서 고행을 한다든가 트라피스트회 수도승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이런 길들이 우리의 길이 아니라 해도 세상의 흐름대로 표류하는 것에 저항해야 하는 도전은 여전히 남는다. 우리의 영혼을 지키는 것, 우리의 마음을 생명의 원천에 모으는 것, 그리고 죽기 전에 우리가 참다운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아는 것은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숙제이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우리도 성인들처럼 다른 이들에게 생명과 빛의 원천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안토니오 성인이 즐겨 말한 것처럼,“옛 교부들은 사막으로 갔으며 그 곳에서 온전한 사람이 되었을 때, 그들은 의사가 되었고, 다시 돌아와서 다른 사람들을 온전하게 만들었다.”





헨리 데이비드 쏘로우는 일상과 관습의 유혹과 잠식에 매우 민감하게 깨어 있었다. 그것들은 우리 모두를 몽유병 환자로 만드는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얼마나 쉽게, 그리고 무감각하게 우리는 어떤 특정한 길에 빠지고, 우리 자신을 위해 마음대로 길을 뒤틀리게 만든다. 지구의 표면은 사람들의 발에 의해 부드럽게 되고 길들여진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은 그런 길들을 따라 표류한다. 세상의 고속도로는 얼마나 낡아빠졌고 먼지투성인가. 전통과 적응의 바퀴자국은 얼마나 깊숙이 새겨져 있는가!”

 

그러나 쏘로우는 이러한 무기력이 마지막 말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월든」에서 그는 극적인 영상으로 성찰을 마무리한다. 그것은 “한 농부의 부엌에 60년 동안 놓여 있었던 사과나무로 만든 오래된 식탁의 마른 잎에서 기어 나온 강하고 아름다운 작은 벌레”의 모습이다. 이 벌레는 식탁으로 쓰여진 나무가 살아 있었던 수십 년 전에 까놓은 유충 알에서 부화되었다. 쏘로우는 말한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어느 누가 부활과 불멸에 대한 믿음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아름다운 벌레”는 우리들의 딱딱한 껍질로 둘러싸인 일상 아래에서 생명의 영이 꿈틀거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매우 적절한 상징이다. 모든 것이 차갑고 둔하고 마비된 것 같이 보여도 한 겨울의 둥근 튤립뿌리처럼, 우리 안에 자리잡고 있는 잠재력­결코 죽지 않고 단지 잠들어 있는­을 깨우쳐 준다.

쏘로우의 말들은 깨어나라는 오래된 도전을, 무기력의 또아리를 흔들어 풀어버리라는, 더 충만하게 살아있기를 배우라는 도전처럼 메아리친다. “우리가 깨어 있을 때에만 새벽은 오는 법이다”라고 그는 썼다. “더 많은 날들이 새벽을 기다리고 있다.” “태양은 다만 새벽 별일 뿐이다.”  

출처 : 어둠 속에 갇힌 불꽃
글쓴이 : 정중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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