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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행복으로 이끄는 성인들

[스크랩] 우리를 행복으로 이끄는 성인들 - 서언

우리를 행복으로 이끄는 성인들

 

-로버트 엘스버그-

 

2005년 3월 / 참사람되어


이 책은 2003년, 미국 메리놀 출판사가 발간한 The Saints' Guide to Happiness(Robert Ellsberg 저)를 편역한 것입니다.

 


서 언

1. 깨어 살아가는 것을 배우기

2. 놓아 버리는 것을 배우기    

3. 노동하는 것을 배우기     

4. 고요히 머무는 것을 배우기 

5. 사랑하는 것을 배우기     

6. 고통받는 것을 배우기     

7. 죽는 것을 배우기     

8. 보는 것을 배우기     

결 언     



서 언



우리는 행복하기 위하여 창조되었다. 그러므로 완전하게 행복한 사람은 자신에게 이렇게 말할 권리가 있다, “나는 지상에서 하느님의 뜻을 행하고 있다” 라고. 모든 의로운 사람들, 모든 성인들, 모든 거룩한 순교자들은 행복했다.

- 도스토예브스키, 「카라마죠프가의 형제들



모든 사람은 마음속 깊숙이 행복에 대한 갈망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행복을 다양한 통로와 다른 모습으로 찾고 있으며 자주 착각이 되기도 하지만, 같은 목표를 추구한다. 파스칼이 말한 것처럼, “어떤 사람은 전쟁에 가고, 또 어떤 사람은 가지 않는 이유는 둘 다 똑같은 욕망을 두 가지 다른 방식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이 욕망이 모든 사람이 하는 모든 행동의 동기이다.”

 

그러나 행복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철학만큼이나 보편적이고, 오래된 질문이다. 행복의 추구는 수많은 책들의 주제가 되어 왔다. 그 중에 꽤 많은 책들은 행복을 얻기 위한 구체적 단계들을 제시한다­“다섯 가지 원칙들”, “9개의 전략” 혹은 “100가지 비법들” 등등. 어떤 책들은 분명하게 행복을 “성공”과 동일시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성공을 물질적 번영이나 심리적 안녕과 연결 지어 생각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행복의 영적인 차원을 밝히면서 깨달음의 자세나 감사, 용서 같은 덕을 강조한다. 이런 범주에 속하는 책들은 불교에서 많이 나온다. 달라이 라마도 「행복의 예술」이라는 베스트셀러로 기여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런 책들을 읽기 전부터 끊임없이 문화적 메시지의 흐름에 의하여 행복에 관한 상상을 키워왔다. 보다 나은 성, 더 젊게 보이는 용모, 혹은 수익이 더 큰 투자 등으로 행복을 약속하는 것은 잡지기사만이 아니다. 실제로 모든 광고와 TV선전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우리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가지고, 그들과 더 같게 보이고, 더 그들처럼 될 때에만 행복하다고 외친다.

 

이 모든 접근방식들은 행복을 어떤 주관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을 공통으로 갖고 있다. 행복은 궁극적으로 행복하게 느끼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느낌이란 심술궂고 변덕스러운 것이며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과 영향에 종속되기 마련이다. 이 사실은 행복이라는 영어단어 어원에 나타난다. “행복(Happiness)”은 “기회”,  “운”을 의미하는 hap에서 나왔는데, 이 hap에서 파생된 단어로는 “일어나다(happen)”나 “우연한 일(happenstance)”이 있다.

 

그러나 행복이 주관적인 것이 아니며, 느낌이나 운의 문제도 아니고, 단순히 그냥 일어나는 어떤 것도 아니라면 어쩔 것인가? 만일 행복이 보다 객관적인 조건, 신체적 건강과 비슷한 것이라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관점을 가졌다. 그가 행복의 의미로 사용했던 희랍어, eudaimonia는 느낌이 아니라 존재하는 방식, 어떤 충만한 삶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행복이란 우주의 이성적 도덕적 질서에 일치하며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것은 프로이드의 쾌락의 원칙보다는 건강한 식물의 만개에 더 가까운 의미이다. 그에게 행복은 영혼의 습관에 뿌리를 두기 때문에 진지한 노력의 선물이다. 또한 같은 이유로 행복은 변덕스러운 운의 대상이 아니다.

 

신약을 그리스말로 번역한 저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단어를 쓰지 않았다. 그들은 또 다른 희랍어, makarios를 사용했는데 이 단어는 신들의 행복을 의미한다. 마태오 복음서에서 예수가 산상수훈을 선포할 때 쓴 단어가 바로 이것이었다. 4세기에 신약을 라틴어로 번역한 예로니모 성인은 beatus라는 단어를 쓰는데, 이것은 행복과 축복의 개념을 합한 것이다. 그래서 이 구절들은 진복팔단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대부분의 성서영역자들은 더 익숙한 표현인 “복되도다(Blessed) ...”를 선택한다. 결국 진복의 선언은 “웃는 얼굴”이나 행복하게 느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전혀 느낌이나 감정에 관한 것이 아니다. 진복선언은 하느님의 생명과 영을 나누는 것­행복에 관한 것이다. 그러한 영 안에서 제자(예수 자신처럼)는 “복된” 처지에 있으면서 슬픔, 고통, 상실을 경험할 수 있다. 여기에서 “복되도다”는 가장 근본적인 의미에서 행복한 것과 같다.

 

이렇게 본다면 그리스도인들이 이 주제에 관해 이야기하기를 너무나 꺼려하는 것은 뜻밖의 일이다. 왜 그럴까? 아마도 행복의 추구가 헛되거나 자기 중심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결국 복음이란 구원에 관한 것이지, 성공이나 “기분 좋게 느끼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른 한편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교를 우울한 도덕주의 그리고 자기부정과 연결시킨다. 그래서 그들은 행복에 관한 충고를 제일 마지막에 구할 수 있는 자리가 그리스도교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이런 모든 사람들, 그리스도인들을 포함한 다른 모든 종교와 피상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은 행복의 주제가 비단실처럼 그리스도교 전통 전체에 흐르고 있으며, 특히 성인들이라고 알려진 거룩한 사람들, 그리스도교 초기의 뛰어난 인물들이 지녔던 지혜 속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리스도교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볼 때, 이런 주장은 낯설거나 이상하게 들린다. 성인들은 물론 거룩함의 전문가들이나, 그들이 행복에 관해서 무엇을 알까? 그것은 물론 우리들이 행복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달려 있다. 그러나 또한 거룩함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서도 결정되는 문제이다. 우리는 보통 성인들이 결점이 없는 사람들이며 오래 전에 기적을 행했고 교회 안에서 생을 보냈으며, 고통받는 기회를 열심히 찾고 일찍 세상을 뜬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이미지의 성인들을 계속 그리고 있는 한 그들의 지혜는 우리가 닿을 수 없고 당혹스러운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우리는 그리스도교가 우리 마음 속의 가장 깊은 염원에 거의 대답할 수 없다고 여기게 된다.

 

그러나 성인들에 대해 더 알게되면서 우리는 그들 역시 우리와 같은 질문들을 추구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즉 삶의 의미와 목적은 무엇인가? 우리의 수많은 희망과 계획들이 왜 슬픔과 실망으로 끝나는가? 우리는 어떻게 참다운 평화를 찾을 수 있는가? 상실, 고통, 변하는 상황에 흔들리지 않는 행복이 있는가? 등의 질문들이다.

 

많은 성인들은 꽤 알려져 있다. 어떤 이들은 순교자로 죽었다. 혹은 기도와 이웃 사랑에 헌신했다. 몇몇 성인들은 살아 있는 동안에 기적을 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마지막에 가서 그들이 성인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그들의 죽는 모습이나 환시, 혹은 훌륭한 행위 때문이 아니라, 사랑과 선함에 대한 탁월한 역량 때문이었으며, 그 모습은 다른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일깨워 주었다.

 

성인들의 삶은 우리들의 삶처럼 대부분 고통과 시련의 삶이었다. 그러나 성인들을 고통과 비참함과 동일시하는 것은 잘못이다. 일반적으로 그들은 그들의 균형과 유머, 연민과 관대함, 장애물과 역경 앞에서 가진 평화와 자유의 정신, 그리고 모든 것 안에서 즐거움을 발견하는 능력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한 자질들은 많은 경우 존경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또한 당대인들에게 경이로움과 갈망의 대상이 되었다.

같은 맥락에서, 성인들을 단순히 오래 전의 인물들로만 여기는 것 역시 잘못이다. 그들은 우리 가운데 어느 곳에든지 있다. 어떤 사람들은 도로시 데이, 토마스 머튼, 오스카 로메로, 마더 데레사 처럼 예외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그러나 또 다른 성인들은 우리가 알고 있거나 매일 지나치는 사람들이다. 우리에게 하느님을 상기시켜 주는 사람들, 그들의 사랑, 용기, 그리고 내적인 조화가 보통의 인간성 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사람으로서 취해야 할 바를 알려주는 기준으로 다가오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우리는 더 큰 기쁨을 느끼고, 살아 있는 것이 더 감사하며, 아마도 그들의 내적인 빛남의 “비밀”을 알고 싶어 할 것이다. 어떤 성인도 “행복에 이르는 안내서”를 작성하지 않았다. 실상 많은 성인들은 복음을 어떤 기능체제나 “쉬운 단계들”로 축소시키려는 유혹을 신중하게 경고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이 관찰한 것처럼, 어떤 사람들은 “상담에 귀 기울이고, 영적인 가르침을 배우고, 이런 주제를 다루는 수많은 책들을 소유하고 읽는 것이 아무리 해도 늘 부족하다.” 성인들은 거룩함을 실천하는 것과 단지 “거룩함을 다루는” 수많은 책들을 읽는 것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이러한 경고를 새기며 나는 이 책에서 다양한 그리스도교 성인들의 삶과 저서들을 통하여 행복의 의미를 드러내려고 한다. 실제로 나의 목표는 우리가 그들로부터 온전하고도 진정한 삶의 의미에 관하여 배울 것이 있는지 찾아보는 것이다. 행복의 추구에 관하여 그들은 어떤 교훈을 제시하고 있는가? 참다운 자아, 최상의 자아로 가는 길에 있어 그들은 우리를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일련의 이 교훈들은 이성보다 직관의 순서를 따르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의 여러 장들 중 어떤 한 장도 성인들의 지혜로 들어가는 입문이 되고, 우리 자신의 여정에 시작으로 사용될 수 있다. 물론 실제 생활에 있어서 이러한 주제들은 서로 얽혀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초기 단계로부터 마지막 단계로 가는 전 과정에는 그것을 다 덮고 있는 어떤 궁형 같은 것이 있다.

 

행복의 추구는 자주 보다 진실한 삶에 대한 처음의 갈증, 사막의 교부들로부터 현대의 탐구자들에 이르기까지 많은 성인들을 이끌었던 어떤 충동으로 시작된다. 그들은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기존 문화의 “무기력함”과 그 가짜 약속들에 저항하는 것으로 행복의 추구를 시작한다. 이러한 충동은 놓아버리기, 노동하기, 고요히 침묵하기, 사랑하기를 배우기­모든 영적 실천의 마지막 목표인­로 그들을 이끈다.

 

이 지점에서 배움은 더 어려워진다. “고통받기를 배우기”는 행복으로 가는 길에서 가장 어렵지만, 가장 필요한 주제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성인들의 지혜는 특별히 효력이 있다. 성인들은 우리에게 고통을 피하는 것을 보여주지 않으며 고통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준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이 보여주는 것은 다만 오로지 거룩함의 길을 따라 가면서 우리가 고통이 더 이상 필연적인 장애물이 되지 않는 그런 행복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죽음의 주제에 관해서도 똑 같이 말하고 있다. 성인들의 행복으로 가는 길에 있어 죽음은 더 이상 적이나 두려운 종말이 아니다. 죽는 것을 배우는 것은 살아가는 것을 배우는데 있어 분리될 수 없는 측면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죽음을 넘어 아직도 넘어야 할 마지막 교훈이 있다. 성인들은 죽음을 인간 역사의 마지막 장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의 비전은 이승의 삶이 품을 수 있는 것 보다 더 큰 행복의 차원에 훈련되어 있다. 매일의 삶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으면서 이 궁극적인 목표는 앞서 나타난 모든 교훈에 가치와 의미를 주고 있다.

 

성인들은 그리스도교의 가장 심오한 지혜를 구체적으로 실천한 사람들이다. 자연히 그들의 가르침은 신앙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에게 더 구체적인 의미를 준다. 그러나 성인들은 한편 같은 인간적 조건을 나누고 있으므로 그들의 경험은 어느 정도 보편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일탈, 좋은 일, 내적인 평화, 그리고 사랑의 중요성 등 많은 지혜가 다른 상담자들과 안내자들의 실천적인 충고와 맥을 같이 한다. 가장 인기가 있는 최근의 격언들 중에서 하나는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걸지 마라”이다. 이런 격언은 예수가 제자인 베타니아의 마르타에게 했던 충고를 연상시킨다. “마르타, 마르타, 너는 쓸데없이 많은 것에 신경을 쓰고 걱정한다. 그러나 한가지만 필요하다.”

 

토마스 머튼은 이렇게 말한다. “행복이란 정확하게 ‘한가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에 있다. 우리의 삶 속에서 그것을 찾아내면 나머지 모든 것을 기꺼이 포기 할 것이다. 그 때에는 거룩한 역설에 따라 한가지 필요한 것과 함께 다른 모든 것이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다.”

“한 가지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각 사람에게 그것의 형태는 다르겠지만, 그 내용은 항상 같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우리 자신의 운명을 실현하는 것, 하느님이 원하시는 모습이 되는 것”이다.





이 책에 실린 “교훈들”은 나 자신의 지혜나 거룩함이 아니라, 나의 질문들과 탐구에 근거하고 있다. 그 탐구 때문에 나는 오래 전 대학을 중도에 그만두고 가톨릭 일꾼으로 향했다. 여러 가지 동기가 나를 그곳으로 데려갔다. 열아홉 살에 나는 삶을 책을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경험해 보고 싶었다. 나 자신만을 위해 사는 것에 지쳤고, 무엇인가 더 크고 더 의미있는 것에 나를 던지고 싶었다. 나는 내가 무엇을 반대하는지 잘 알고 있었고, 나의 삶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찾고 싶었다.

 

가톨릭일꾼운동의 창시자이며 운동이 발간하는 신문의 편집자인 도로시 데이는 이러한 동기들을 잘 이해했다. 그는 자신이 쓴 마지막 글에서 “가톨릭일꾼운동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라고 묻고 대답한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학교이며 노동캠프이다. 그 곳에는 마음이 넓고 사회적 의식이 있는 젊은이들이 와서 성소를 찾는다. 수개월 혹은 수년을 지낸 후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삶을 원하는지 확실하게 깨닫는다. 어떤 이들은 의료, 간호, 법, 교사, 농사, 저술, 출판계로 간다. 그들은 연민으로 사랑하는 것을 배울 뿐만 아니라, 폭력을 재촉하는 위험한 감정,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을 배운다.”

 

나는 도로시 데이의 생애 마지막 5년 동안 가톨릭일꾼에서 함께 살았다. 떠날 때 나는 내가 추구하고 있던 것을 거의 다 발견했고, 그 보다 더 많이 찾았다, 그 중에 하나는 내가 가톨릭이 된 것이었다. 가톨릭의 매력은 교의나 교회의 권위와 거의 상관이 없었고, 나는 그것에 대해 거의 이해하는 바가 없었다. 가톨릭의 매력은 훨씬 더 성인들의 지혜와 모범에 그리고 다양한 영적 고전서가 지닌 힘에 있었다. 어거스틴 성인에게서 나는 나의 삶이 하느님의 창조와 은총이야기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배웠다. 파스칼에게서 나는 복음의 메시지가 내 마음의 질문들과 상응된다는 것을 배웠다. 훌래너리 오코너로부터 삶을 신앙의 눈으로 볼 때 얼마나 다른가를 배웠다. 그리고 도로시 데이로부터 나는 성인들을 알고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단지 그리스도교 역사의 전설적인 인물들로서가 아니라, 친구와 동료로서, 가족의 일원으로서 그들을 받아들이는 것을 배웠다. 도로시 데이는 성인들에 대해 말할 때 그들을 그렇게 여겼다.

 

거룩함과 행복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해준 것은 도로시 데이였다. 그는 특별한 활력을 지닌 사람이었다.­기도에 깊이 잠기지만, 옆에 있는 사람에게 전적으로 현존했다. 다른 이들의 고통에 예민하게 깨어 있지만, 그와 똑 같이 아름다움의 징표에 민감하며, 그가 “기쁨의 의무”라고 했던 것에 늘 깨어 있었다. 도로시 데이는 영원의 빛으로 매일의 뉴스를 읽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있을 때면 당신이 세계를 바꿀 수 있으며,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느끼게 해 주고, 그 작업은 엄청난 모험이 될 것이라고 믿게 해 주는 놀라운 영향을 미쳤다.

 

가톨릭이 된 후 수년동안 사람들은 자주 나에게 사제나 수도자가 될 계획이 없느냐고 물어왔다. 그러나 결국 그것은 나의 길이 아니었다. 나는 결혼했고, 세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종교서적 출판사의 편집자로 일한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 속에서, 가정생활의 기쁨과 소란 속에서, 나는 성인들과 대화를 계속한다. 때때로 그들의 삶은 내가 살고 있는 세계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나는 때로 잠자리에서 부럽게 이런 생각을 한다. 수도원의 방에서 고요와 고독 가운데 하느님을 찾는다면 얼마나 수월할까.

 

그러나 성인들의 중심적인 교훈이 떠오른다: 우리 삶의 현재상황과 주어진 조건이 거룩함으로 가는 우리의 길을 모두에게 마련해 준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나의 수도원이다! 현재 삶에서 하느님께 가는 길이 있다면 나는 그것을 일 가운데에서, 가족 생활 속에서, 나의 시간과 주의를 요구하는 수많은 필요들에 응답하면서 찾는 것을 배워야 한다. 인내, 겸손, 용서, 자기희생, 너그러움을 연습하는 기회를 찾기 위하여 어떤 특별한 종교적 장소로 도망 갈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배워야 한다. 가족은 바로 그런 기회를 제공하는 이상적인 자리가 될 수 있다. 어떤 측면에서는 수도원보다 더 좋은 자리이다. 모든 것, 이 책을 쓰는 것조차 하느님께로 가는 나의 길이다. 그렇게 존재하는 것, 그것이 나 자신의 행복에 이르는 길이 되어야 한다.





성인들의 삶에서 정규적으로 나타나는 복음구절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예수와 “부자청년”의 이야기이다. 청년은 예수께 와서 행복의 비밀(“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합니까?”)을 물었다. 예수는 그에게 “가서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리고 나를 따라 오라”고 말했다. 그 분은 이 젊은 청년에게 비참한 삶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 그가 전에 알고 있는 어떤 것보다 더 부유한 삶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마르꼬 사가는 예수가 그를 바라보고 “사랑했다”고 의미심장하게 표현한다. 그러나 확실히 예수의 초대는 그 청년에게 지나친 요구였고, 동시에 충분치 않은 요구였다. 아마도 청년은 “다섯 가지 원칙들”이나, “열 가지 쉬운 단계들”을 더 선호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슬프게 떠나갔다.

 

수많은 성인들에게 이 부자청년의 이야기는 그들의 삶에 있어 중추적인 선택을 의미했다. 그들은 예수의 도전과 초대에 응답할 것인가, 아니면 그들 역시 부자 청년처럼 슬프게 떠나 갈 것인가? 행복하게도 그들은 초대에 응답했다. 이 책의 교훈들은 그들이 보았고 배웠던 것들을 서술하고 따라가 본다.

출처 : 어둠 속에 갇힌 불꽃
글쓴이 : 정중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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