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 영성

바른 영성이란?

샘물 퐁퐁 2010. 2. 15. 15:27

바른 영성이란 ?

 

                                                            

                                                                                                                                      성인경 목사(한국 L'Abri 대표)


낯선 곳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이정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만약 이정표가 부정확하거나 뒤바뀐 경우에는 고생을 하거나 아니면 엉뚱한 곳을 가게 됩니다. 길도 없는 바다를 항해하는 배에는 나침반이나 레이더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만약 나침반이나 레이더가 고장이 나면 그 배는 허송세월 후에 결국은 실망의 항구에  닻을 내리고 말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인들의 인생길에 있어서는 '영성(영성,  Spirituality)'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영성은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믿음의  길이 바른가를 확인할 수 있는 이정표요 나침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른 영성이 무엇인가', 즉 '영적 체험의 성질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대단히 중요한 물음이며, 이것은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과 사도 바울이 마주쳤던 청중들의 문제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1. 젊은이들의 영적 갈등의 현실

오늘날 젊은 세대들이 영성에 대해 느끼는 영적  갈등에는 몇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그 유형을 세 사람의 특별한  사례를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이 사례들은 제가 라브리(L'Abri)에서 일하면서  만난 전형적인 사람들이며, 영적  갈등의 현실을 진단하는 좋은 예가 될 줄로 압니다.

 

첫째, 쫀쫀한 사람이 되기 싫어서 기독교를 믿지 않는다.

저의 집에 찾아오는 한 무신론자에게  "기독교를 믿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더니 그가 대답하기를, "예수 믿으면 사람이 째째해지고 쫀쫀해질까봐 믿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신자들의 '생각이 좁아지고 사는 것이 편협해진다'는 것입니다. 좀 풍성하고 자유롭고

넓은 시야를 갖기를 원하는 그에게는 기독교가 마치 '좁쌀같은 사람'으로 만들거나 인생을 옭아매는 '오얏줄'로 생각된 것입니다. 그의 결론은 '신자들의 시야가 좁고 편협한 것은 예수가 그런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는 한 번도 성경을 읽은  적도 없고, 교회에 다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먼저 믿는 사람들의 생각과 생활을 보니까  인생을 망칠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는 말씀을 듣고, 기독교는 사람을 째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죄와  좁쌀같은 찌들린 인생으로부터 자유케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둘째, 허무한 일만 해야 하는 인생이 한심스럽다.

한 자매는 언제나 "나는 여자로 태어나서  인생이 얼마나 허무한가? 밥하고, 설겆이 하고, 청소하고, 빨래하다가 하루를 다 보내는 구나."고 한숨을 짓고 사는 자매였습니다. 그는 어느날 부엌에서 밥 먹은 그릇을 씻으며 설겆이 하는 시간이 아까워서 싱크대 앞에 붙은 성경 암송구절이 적힌 쪽지를 읽고 있었습니다. 그가 생각할  때, 설겆이는 허무한 일이고, 성경암송은 영적인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아침의 종이에는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는 말씀을 읽고는, 당장 그 쪽지를  찢어버렸습니다. 왜 찢어버렸을까요? 설겆이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영적인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셋째, 기독교는 비합리적이며 비지성적이다.

어느 추운 겨울 날에 한 대학원생  청년이 차를 한 잔 다 마시고 하는 말이 "저는 어릴 때부터 예수를 믿었고  최근까지 대학에서 성경공부 모임의 리더였습니다. 그러나  이 고민이 풀리지 않으면 예수 믿는 것을 그만 둘까 생각하고  아버지로부터 한 달 교회로 부터 방학을 얻어 찾아 왔습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청년의 고민은 '성경이 과연 믿을만한 진리인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라브리에 오기 전에 다른  지도자들로부터 "기도해 보라, 성경을 암송해 보라, 전도해 보라." 는 충고를 받고 그대로 다 해  보았답니다. 왜냐하면 그는 '기독교는 믿는 것이지 아는 것과는 상관없다'는 말을 듣고 자랐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의심을 인식론의  문제라고 부르는데,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은 믿고 있지만 지식적으로 그것을 수납하고 확신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가 한 달 동안 공부하면서, "믿는 것과 아는 것에 하나가 되라." (에베소서 4:13)는 말씀을 깨닫지  못했다면 신앙의 방학이 영원히 계속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문제들은 영성이 잘못되어서 생기는 문제들의 단순한 예에 불과 한 것들입니다

 

 

2. 영성의 위기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영성의 위기는 바울사도가 경고한 대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데 있습니다. (딤후3:5)
    바울은 이것을 말세의 영적 상황이라고 말했습니다. 즉 신앙의 형식은 화려하고 번지르르 하면서도 실제로 신앙의  '실체와 매력(Reality & Beauty)'이 없는 삶을 사는 그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안데르센의 동화에 나오는  '벌거숭이 임금님'과 같이 영적 허구와  사치에 빠져서 자기가 벌거벗은 줄도 모르고 거리를 활보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은  잘못된 영성을 '괴물같은 영성'이라고 부른다면 지나칠까요?

대표적인 몇 가지만 살펴봅시다.

 

첫째, 괴물같은 영성은 외식적인 영성입니다.

신앙과 윤리를 '거꾸로' 사는 삶을 말합니다. 신앙이 사람들을 위한 과시용이 되거나, 윤리가 하나님을 위한 선행용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고백하여야하는 신앙은 남에게 보이기 위해 공개가 되고, 이웃에게 실천되어져야 하는 윤리는 하나님께 자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영적 원리와는 완전히 '거꾸로' 된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과 윤리가 거꾸로 된 외식적인 영성"(John Stott)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만났던 바리새인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구제, 기도, 금식, 헌금과 같은 신앙적 행위들은 하나님만 아시도록 행해야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행했습니다(마6:1-21), 그리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고, 화해하고, 사랑하는 것 등의 '윤리적인 행위'들은 이웃을 위하여 행해야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게 잘 보일려다가' 율법의 정신을 실천하지 않은 것입니다.(마5:13-48). 그러나 고차원적인 영성을 위해 얼마나  많은 율법과 규칙을 설정하고 맹훈련을 강조하는지 모릅니다. 무슨  영성훈련의 비결이라는 방법론들은 태반이 그런 것입니다. 오늘날 연륜과 직분에 상관없이 영적으로 무기력하고 사회적으로도 아무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이유는 이처럼 신앙과 윤리를 도치(도치)시켜 살기 때문입니다.

 

둘째, 괴물같은 영성은 다분히 부정적인 영성입니다.

어떤 사람은 신앙생활이 너무 진지하다 못해  부정적이고 염세적이기까지 합니다. 영적이 된다는 것을 인간성이 파괴된다든가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많은 신자들이 세상 속에서의  힘든 영적 전투를 포기하고 기독교적인 고립문화 속으로 도피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것은 1세기 골로새교회의 문제가 현대교회에 다시 재현되는 것입니다. 즉, 다분히 '염세적이고', '금욕적이며', '더  높은영적 생활'을 추구한다는 면이 그것입니다.(골로새서2:16-20) 이런 사람들의 모토는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일상적인 생활과 세상살이를 무가치하게  여기고 나무기둥 위에서 자기만의 신비적인 세계를추구하는 것을 최고의 영성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그것은 기인적(기인적, eccentric)이고 금욕적(금욕적, ascetic)인 영성입니다. "이러한 부정적인  영성은 세속적인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매우 지혜롭고 영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죄에 대항하여 싸우는데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들입니다."(Ranald Macaulay).

 

셋째, 괴물같은 영성은 반지성적인 영성입니다.

오늘날 동서양을 막론하고 기독교인은 반지성주의에 빠지고  있습니다. "지식은 신앙에 방해가 된다"든지, "학문은 신앙의 적이다."는 말들이 교회  안에서 은밀한 중에 퍼지고 있습니다. 미국교회도  "많은 기독교인들 중에는 구원받은 영혼에 바벨론 사람의 두뇌를 가진 사람들이 많다."(David  Bradshaw)는 지적을 받고 있습니다. 특히 개인의 체험이나 느낌이 절대시되는 실존주의적이고 상대주의적인 시대 속에서 기독교적인 지성이 자리잡을 틈바구니를 제공받지 못하고 살고 있습니다.
  바울사도가 지적했듯이, 우리는 고린도교회와 같이 "수다한  사람(궤변가)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고후2:17) 상황 속에 살고 있습니다. 여기의 '혼잡하게  한다'는 말은 '섞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세상의 사상을 섞어서 지적인 혼돈을  야기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고린도교회에서도 온갖  문제들이 유대사상과 세속적인 철학에서 유발되고있었지만 오늘날과 같이 반지성적인 태도  때문에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기독교인이 처한 영성의 위기중의 하나는 '반지성주의'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영성은 믿는 것과 아는 것은 분리시키며 기독교를 비지성적인 종교로  전락시키고 전도의 문을 닫게 합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영성의 위기 가운데 있으면서도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교회의 제도나 인위적인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마치 영적 능력이 살아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사는 것"(Francis Schaeffer)은 영적 생활의 실체와 매력을 상실한 삶인 것입니다.

 

 

3. 잘못된 영성의 원인과 결과

잘못된 영성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편의상 가장 흔하면서 영향을 많이 미치고 있다고 보여지는 세 가지  원인만 살펴보고 그 결과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잘못된 영성은 동양 종교에 제일 큰 원인이 있습니다.

불교와 유교는 오랫동안 우리 민족의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해 왔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원하든 원치않든 우리의 판단과 생활의 틀이며 세계관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불교의 염세적인 구원관과 유교의  인식론은 많은 기독교인들의 영성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습니다.
  불교에 의하면 인생의 눈에 보이는 삼라만상은 하나의 신기루와 같기 때문에 모든 존재는 허무하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허무한 존재로 부터 해탈하여 '열반(Nirvana)'의 구원에 이르는 것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래서 불교는 이러한 허무한 세상에서 건짐을 받기 위해서는 현실을 등지고 참선(참선)에 열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한국불교의 영웅인 성철 스님은 10년을 말하지 않고, 8년을 누워서 자지 않고, 한평생을 산 속에서 사셨답니다.
그는 결혼한 아내와 딸을 버리고 불교에 귀의한 것을 일컬어  "나의 10원 짜리와 100원 짜리를 바꿀 수가 없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불교의 영성은 초대교회에 성행했던 영지주의자들의 그것과 같이 매우 기인적이고 염세적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불교 신자들보다 영적으로 더 훈련되어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는 점에서 훈련에 관해 많은 관심이 있는지도 모름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금욕주의가 아니다."(Jerram Barrs)라는 말이 일리가 있는 것입니다.
유교에 의하면 인간의 완성은 '자의식', 즉 자신의 윤리적 자아를 깨닫는 것이며, 이것이 최종적인 지식의 가치라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교는 신앙적인 행위마저도 윤리적으로 해석하려 듭니다.  윤리로 해석한다는 것은, 유교가 윤리학인 것처럼, 하나님보다는 사람들에게 보이고 나타내는데 신경을 쓴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자의식'에 이르는 최선의 길은 지성의 사용을 중단하거나 멈추는 것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지성은 인간의 욕망과 감정에 의해 깊이 영향을 받기 때문에  지고의 지식과 진리를 아는데 적합하지 않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식의 주체는 이성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물론 여기의 '마음'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지성(Nous)' 혹은 종교 도덕적인 자리인 '마음(Kardia)'이 아니라, '감성'혹은 '직관'을 말합니다. 맹자는 그것을  '정'(정)이라고 불렀고 인간의 '순수감정'을 의미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본심에서 자연적으로 우러 나오는 측은지심의 감정인데, '감정과 이성이 하나로 꿰뚫린 정리일관(정리일관)'의  원융세계(원융세계)로 이끌어 올리는 '창조적  감정(creative feeling)'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김용옥). 그러나, 기독신앙은 사실을 근거한 '지식'을 포함하는 것이지 단지 감정과 체험에 의존하지는  않습니다. 감정에만 의존하는 신앙은 맹신이거나 비약일 것입니다. 불교와 유교는 육체를 금욕하거나 지성을 금욕시킵니다. 그러나, 둘다 비인간적이며 비영적인 길입니다.

 

둘째, 괴물같은 영성은 서양적인 이원론 사상 때문입니다.

이원론은 서양에서는  플라톤(Plato)의 철학에서 그  근원을 찾아  볼 수 있으며,  우리 나라에서는 중국의  왓치만 니(Watchman Nee)를 따르는 영성주의자들에 의해 대중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원론이 철학사와 교회사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구태여 여러 학자들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화이트헤드(A. N. Whitehead)가 "서양 철학사는 플라톤의 각주(footnote)에 불과하다"고 한 말로도  충분합니다. 그는 이 세상을 '물질계'와 '정신계'로 양분하고, 물질계에는 인간의 육체, 감각, 이성이 속하며, 이것들은  임시적이고 불완전한 '그림자'로 규정했습니다. 그리고, 정신계에는 영혼, 혹은 정신이 속하며, 이것은 영원하고 완전한 '아이디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원론은 영성과 관련하여 크게 불건전한 신비주의와 금욕주의를 낳았습니다. 가끔 '최상의 영적 체험'을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는 신인합일(신인합일)의 탈인격적인 경지를 맛보았다는 것을 자랑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서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과  하나이기 때문에 다시는 범죄치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혹은 정신계가  물질계를 능가한다고 보고 인간의 지식과 언어를 무시하기도 합니다. 말과 생각이 사라진 침묵과  명상이 중요시되며, 일상적인 인간의 언어는 신과의 대화를 위한 최선의 도구로써 적절치 못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인간성을 파괴하고 인간이 설 자리를 빼앗아 버리는 것입니다. 또한 금욕주의를 조장하기도 합니다. 정신이 육체 안에 갇혀 있기 때문에 궁극적인 해방은 죽음이라고 생각하고, 육체로부터 탈출하기 위하여 육체를 학대하거나 육체적인 죽음을 자초하므로써 영혼을 더  맑고 깨끗하게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셋째, 잘못된 영성은 현대 신학과 철학의 영향도 있습니다.

특히 현대 신학과 철학은 반지성적인 영성을 조장합니다. 대표적인 말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신앙이 점하고 있는 자리는 이성이 아니라 감정과 의지이다(Schleiermacher)." 종교는 자기 자신을 아직 잊지  않았거나 혹은 이미 자기 자신을 상실해버린 인간의 자기 의식이고 감정이며... 종교는 인간의 자기 감정이며 억압받는 자의 한숨이다."(K. Marx)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사건이 위대한 이유는, 도저히 바칠 수

없는 상황에서 신앙의 비약을 감행했기 때문이다(Kierkegaard).
현대 신학과 철학이 동일하게 주장하는 것은  '신앙과 지성은 충돌한다.'는 것입니다. 가끔 지성은 신앙의 방해물이라고 하거나 영적인 체험의 '적', 혹은 '원수'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결국 기독신앙의 본질은 '반지성적'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을 바울을 반지성적인 전도자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철학을 '초등학문'이라고 비난할 때(골로새서2:8), 모든 철학이 무가치 하다거나 지적인 방법으로 학문을 추구하는 것까지 비난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의 철학은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지 않고 인간의 자율적인 이성의 능력만 의지하면서 성경을 중심으로한 사색과 방법을 택하지 않은것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바울의 '지성적 전도'에는 열매가 별로 없었다고 우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특히 철학의 도시인 아테네에서 바울이 철학적 변론을 한 결과로 전도의 열매를 얻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아테네에서 뿐만 아니라 빌립보에서도 지적인 고민을 가진 '루디아'와 같은 지성적인 사람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한 적이 있습니다(사도행전16,17장). 바른 지성이 없이는 바른 영성이나 효과적인 전도를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4. 성경적인 영성이란

성경적인 영성은 외식적이거나 염세적이거나 반지성적인 영성과는 다릅니다. 그러한 영성은 기독교의 영적 체험의 본질이 아닙니다. 더구나 현대 산업사회 속에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의 피곤하고 메마른 영혼을 위한 바른 해결책이 아닙니다.
그러면 이제 성경적인 영성의 본질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차례입니다.

 

첫째,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입니다. (엡4:22-24, 골로새서3:9-10, 고린도후서3:18)

여기의 하나님의 '형상(Ikon)'이란 말은 인간 창조의 특수한 성격과 영적 체험의 본질을 나타내는 하나의 체계적인 신학용어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지식, 의,  거룩, 사랑, 창조성 등을 말합니다. 즉 영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하나님의 자녀로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영적 체험과 성격을 말하며, 구원론적으로는 성화의 교리와 관계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성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나타나는 규격화되고 형식화된 어떤 정형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영적 체험의 본질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의 영적 체험이란  단지 영혼의 중생뿐만 아니라 전 인격적인 변화와 구원을  말합니다. "인간의 유일한 목적은", 일찌기 종교개혁가 존 칼빈은 이점을  지적하여,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손상되고 소멸된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 안에회복하는 것이다" (J. Calvin, Inst., 3:3:9)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은 실제적으로는 인간이 관여하는 모든 관계의 회복, 즉  하나님과의 신앙적인 관계(spiritual relationship)뿐만  아니라 자신과의 심리적인 관계(psychological  relationship), 이웃간의 사회적인  관계(social realtionship), 자연과의 환경적인 관계(ecological  relationship)를 회복하고 과시하는 것입니다.(눅10:27, 로마서3:25, 에베소서4:24-6:22). 이러한 관계들의 회복은 삶의 전 영역에 걸친 주님의 주권(Lordship)을 회복하는 것(고전 10:31)입니다. 그것을 쉐퍼(F. Schaeffer)는 말하기를, "나는 바른 영성의 강조점을 삶의  전 영역, 즉 예술, 문학 등에서부터 법과 정부의 영역까지를 예수님의 주권 아래에 두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둘째, 예수님을 순간순간 실존적으로 신앙하는 것(moment by moment trust)입니다.

특히 오래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 중에는 종종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사역을 '기억'이라는 박물관속에 묻어두고는 영적으로 무기력하게 되어버린 사람들이 많습니다. 바른 영성은 마치 포도가지가 포도 나무에 '붙어 있듯이'(요한복음 15:4), 혹은 젖먹이가 목이 말라서  혀가 입천장에 '붙어 있듯이'(예레미야애가4:4) 계속적으로 주님을 신뢰하고 본받는  것입니다.
'믿음'은 구원받는 전 과정 속에서 역사하는 힘이 되어야 하며 단지 중생 하는데 필요한 통과 의례가 되어서는 곤란합니다.
영적으로 무기력한 이유중에 하나는 믿음은 없고, 온갖 형식과 테크닉에 신경쓰는 것입니다.  버스에서 발이 밟혔을 때, 성적인 유혹이 다가왔을 때, 좌절에 빠질 때  여러분은 어떻게 그 영적 위기를 극복합니까? 신사 체면으로, 인내심으로 아니면 믿음으로 이깁니까? 어떤 사람은 "속으로는 화가  나지만 이빨을 깨물고 참는다."고 말했는데, 그 정도는 예수 안 믿는사람도 합니다. 대답은 "믿음으로" 극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위대한 점은 독자 이삭을 바치라는  영적 위기와시험 앞에서 "믿음"을 가진 것입니다. 처음 예수님 앞에 나아와서 죄를 용서받을 때에나, 어떠한 시험과 위기 앞에서나  천국의 하나님 앞에서나 항상 있어야 할 것이 하나가  있는데 그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위기를 대처하는 것입니다.

 

셋째, 전투적인 삶입니다.

믿기만 하고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수동성'뿐만 아니라 인간의 자유와 선택에 의한  '적극적'인 행위를 요구합니다. 우리의 삶 전체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도록 그리스도의 은혜에 전적으로 의존하면서도 성령을 따라 기도와 말씀으로 우리의 악한 행실을 죽이려고 애쓰는 것을 말합니다.(로마서8:13, 빌립보서3:13;14). 전투적인 삶에는 성령의 능력이 필수적이며, 동시에 우리가 최선을 다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즉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면서 동시에 내가 최선을 다하여 죄와 싸우는 삶, 즉 100%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동시에 100% 인간의 자기 책임을 지는 것, 이것이 영성의 핵심인 동시에 사실은 쉽고도 어려운 점입니다.

쉐퍼(Francis  Schaeffer)는 이러한 기독교인의 영성을 간단하게 "수동적 적극성(passive activity)"이라고 표현한 바가 있습니다.
  바른 영성은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실패 속에서  좌절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이기신 승리를 누리고 그 나라의 영광에 참여  하는 것입니다. 세상으로부터 도피하거나 폐쇄적인 삶이 아니라 세상의 악을 향하여  영적전투를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이  세상에 안주하기 위하여 사는 자가 아니라 세상의 악을 정복하고 다스리기  위하여 하나님이 부르신 "군사들"입니다. 시편 110편에 나오는 '새벽 이슬같은 청년'이란 말은 '하나님 나라의 보배들이 청년들임'을 상징하는데, 왜 청년들을 천국의 보배라고 부르는지 아십니까? 그들이 주님의 영광스러운 전쟁에 부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직면한 영적, 지적, 사회적 전쟁을 위해 헌신한 사람들이 곧 '새벽 이슬'같은 존재들입니다. 바른 영성은 전투적인 영성입니다.

 

넷째, 인간을 자유롭게하고 인간답게 살게 하는 것입니다.

본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일상적인 삶을 통해 체험하고 과시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우리가 말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은 침묵하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과시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를 만드신 분은 말씀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선포하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만이 누리는 영광스러운 삶의 특권입니다. 그러므로 바른 영성은 죄악으로 파괴된 인간의 형상이 새롭게 되어 예수 안에서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이 되는 체험입니다.(요한복음 8:32, 에베소서4:22-24, 골로새서). "예수믿는 사람은 많아도 사람다운 사람을 보기 어렵다."는 주위의 비판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 요즈음, 예수믿지 않는 사람들의 눈에 우리가 도피적이고 염세적인 인간으로 보이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바울은 염세적인 영성에 빠진 골로새교회가 회복되는 길로서 '세 가지로부터 자유를 얻을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골로새서2:5-3:17). 먼저 세상으로부터 자유를 얻으라는  것입니다. '세상으로부터 자유'는 세상을 등지고 세상을 떠나서 기독교적인 고립 문화속에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 안에  살면서도 세상에 속해서 세상의 조류대로 살지 않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으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율법의 멍에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율법을 완성하셨는데도 아직도그런 율법의 종이 되어 있어서는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육체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이것은 육신의 정욕과 죄로부터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며, 결코 일상적인 육체적인 체험이나 평범한 인간 생활을 죄악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바른 영성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지 결코 부정적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인간성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인간성을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이원론에서 말하는 영육의 분리는 죄의  결과이며 형벌이지 결코 구원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을 예수쟁이 만들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인간다운 인간을 만들려고  오셨다."(HansRookmaaker)고 말한 것은 적절한 지적입니다.  바른 영성은 믿음으로 세상과 싸워 이기고 율법의 멍에를 벗고 육체를 하나님의 의의 연장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다섯째, 바른 영성은 지성과 체험이 하나로 통합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기독교 신앙이 지성적이며 동시에 체험적이라는 것을 고백합니다. 바울은 로마에 보낸 그의 편지에서, "나는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한다"고 말하여 자신이 기독교 복음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가 대단함을 표현합니다. 바울의 그러한 자부심이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바울의 다음 말을 들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라고 말합니다(로마서1:16,17). 전통적으로 유대인은 체험적인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식적인 '지혜'를 찾았습니다.(고린도전서1:22) 그렇다면 바울의 자부심은 복음이 체험성과 지식성을 다같이 가지고 있다는데 근거합니다.  그것이 구원의 능력이 있는 복음과 그렇지 못한 '다른 복음'과의 차이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기독교 복음이 체험적으로나 지성적으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구원의 능력이 됨을 확신한 것 입니다. 그리고, "믿는 것과 아는 것에 하나"(엡4:13-14)가 되는 것이 성숙한 신앙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바울 신학의 그 어디에도 기독교 신앙이 비지성적이거나, 기독교 영성은 반지성적이라는 약간의 힌트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사실 반지성은 반신앙과 통하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반지성적이라면 그것은 '미신'입니다. 그리고 그 미신은 자유주의 신학자와 철학자들이 세뇌시킨 결과입니다. 오히려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권고했던 말씀을 기억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하나님 아는 것을 대항하여 높아진 모든 이론과  모든 생각을 사로 잡아서 파괴하며 그리스도께 복종시키라"(고후10:4,5). 바른 영성은 지성과 체험의 어느 한 쪽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양쪽의 풍성함을 누리는 것입니다.

 

여섯째, 죄 짓는 것 외에는 모든 것이 영적이다.

우리가 먹든지 마시든지, 공부하든지 데이트 하든지,  컴퓨터 앞에 앉았든지, 설겆이를 하든지, 성경을 읽고 기도하든지,무엇을 하든지 주안에서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영적인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세속 사상과 우상 제물, 기타 여러 가지 문제로 고민하던 고린도 교회에  제시하신 바른 영성이란 무엇인가?(고전10:24-31) 그것은 "죄 짓는 것 외에는 모두가 영적이다", 즉 "모든 것이 다 가하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 전제입니다. 디모데에게 보낸 바울의 편지에서도"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은 모든 것이 다 선하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딤전4:4의역)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영성, 혹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성은 어떤 것이었을까?(눅24, 요31) 그 분은 산책을 즐기셨고,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셨고, 나무를 모아 불을 피우시고 일하셨으며, 생선과 빵을 드셨으므로 소화시키셨고, 친구들을 좋아하셨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밀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이 사신 모습중에 하나만 영적이라고 생각하는 습관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제일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전부는 아니였다는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 전체가 거룩하고  영적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죄 짓는 것 외에는 모든 것이 영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순간순간 초자연적인 성령의 능력 가운데서 주님을 의지하며 살아야 합니다.

 

 

 

  

                                                          James Galway (제임스 골웨이) 플룻 연주곡 모음

 

*  라브리(L'Abri Fellowship) 국제적인 기독교 공동체 연구소입니다.

   "라브리" 불어로 "피난처"라는 뜻이며, 라브리는 인생의 갈림길에서 부딪히는 온갖 문제의 대답을

   찾기 위해 누구나 잠시 머물렀다 있는 영적 피난처입니다.
   프란시스 쉐퍼박사 부부(Francis & Edith Schaeffer) 1955년에 스위스의 알프스
산기슭 위에

   모(Huemoz) 동네에서 라브리를 시작한 이래로 현재는 세계에 일곱 군데의 합숙 연구소와

   세 군데의 자료센터가 운영되고 있습니다.

   라브리는 학기(term) 단위로 운영합니다. 학기는 라브리에서 한두 가지의 주제를

   깊이있게 연구하고 공동체 생활의 매력을 느끼기에 충분하다고 여겨지는 기간으로

   한국라브리에서는 계절에 따라 5~10주씩으로 합니다. 미리 발표된 학기 기간 중에만
   학생을 받을 있습니다. 학기와 학기 사이에는 간사들의 휴식과 외부 강의
,
   그리고 시설 보수 등이 이루어집니다.

   라브리는 기독교인이나 비기독교인이나 누구든지 찾아올 있으며, 사고하는 뿐만
   아니라 인간 생활 전체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라브리의 기본적인 목적은 찿아오는 사람들이 안고 있는 고민에 대한 대답을 찾도록 도와주어

   기독교의 하나님이 살아 계심과 분의 말씀이 진리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신앙의 실체와 매력을 균형 있게 발견하도록 돕는 사역을 말합니다.
   물론 라브리가 이러한 일을 완벽하게 수행한다고 말하는 것을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을

   믿고 성령님의 능력을 의지하며 성경을 바르게 가르치고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라브리의 기본적인 입장은, 역사적이고 성경적인 기독교가 진리(眞理)라는 것과
   그것이 사실임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라브리는 "무조건 믿으라" 말을 하기보다 먼저 학생들의 질문과 문제들을
   신중하게 논의합니다. 라브리는, 기독교가 진리라면 그것은 종교적인 영역뿐만 아니라
   우주와 역사 그리고 인간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도 정직한 대답을 준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라브리는 "정직한 질문에 정직한 대답" 주려고 노력합니다.
   이것은 종교, 역사, 심리학, 교육, 정치, 사회 현대 인간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라브리가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돕는다는 뜻입니다.

   성경적인 기독교는 종교나 이념이 아니라,  죄인들을 위한 구원의 복음이며,
   만물의 존재 양식에 부합하는 진리입니다.

   이와 같은 철학은 다음의 가지를 강조합니다.
   1.
영적 실체는 일상 생활의 영역에서 순간순간 과시되어야 한다.
   2.
성경적인 세계관은 모든 인간 지식과 상관성을 가진다.
   3.
사회적인 윤리, 사랑과 공의는 공동체 안에서 실천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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