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 글

인디안 추장의 연설 서평

샘물 퐁퐁 2011. 5. 19. 14:26

 

 

인용1. http://blog.paran.com/shshon/3406752 님의 서평

인디안 추장의 연설 (자연관과 인생관)

 "두아미시·수쿠아미시족" 인디어 추장의 연설에서 자연관과 인생관을 배울수 있는

기회라 생각이 되는군요. 제 자신과 주변을 다시 한번 돌아보는 계기라 생각되어..

 

이 연설이 행해진 것은 1854, 미합중국대통령 피어스에 의해서 대표자들이

이 인디언 부족이 전통적으로 살아온 땅을 팔 것을 제안하게 되었다.

 

지금의 워싱턴주에 해당하는 이 지역 토착민들의 삶터를 차지하는 대신에

그들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보존지구를 주겠다는 것이 백인 정부의 제안이었다.

 

여기에 대하여 몸집이 장대하고 우렁찬 목소리를 가졌다고 전해지는 추장은

다음과 같이 답하였는데, 거의 시적이라고 할 만한 연설문은 오늘날 환경과

자연에 대한 분별없는 파괴의 결과로 인하여 전 인류가 심각한 위기에 대면하게된

시대에 오히려 생생한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

 

인용2.  http://www.ecocreative.net/tt/index.php?pl=361 서평

인디언 추장 연설문


'
인디언'들은 자신들을 '인디언'이라고 부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인디언'이란 단어가 '인도에서 건너온 야만인'이란 뜻으로 백인들이 아메리카원주민을 폄하하는 차원에서 불려지는 이름이다. 그들은 '아메리카 원주민'이란 단어를 사용하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편의상 입에 붙은 말을 어찌할 도리가 없기에 폄하하는 뜻이 아닌 일상의 용어로서 '인디언'이란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양해한다.


근래 인디언에 관련된 서적을 몇권 보았다. 백인들이 인디언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인디언에 대한 역사적 고찰이라기 보다는 백인의 개척역사 과시차원이 크다. 하지만 최근에 몇권의 인디언 관련서적은 상당히 인디언의 입장을 조명했다. 오히예사의 '인디언의 영혼' 인디언의 사상과 철학, 교육을 이해할 있었고, '신화의 '에서는 전체적인 인간사에서 인디언존재 의미를 되새길수 있었으며 지금 덮은 '인디언추장연설문'에서는 인디언 문명이 멸망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인간으로서 무엇을 위해 싸웠고 무엇을 지키려 했는지 엿볼수 있었다
.


인디언도 똑같은 사람이다
.
내가 이책을 보고 마지막 느낌이다. 그들은 백인보다 문명적으로 기술적으로 떨어졌지만 그들만의 사상과 종교를 통해 삶의 철학과 방식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그것은 인간의 보편적인 정신적 이상과 하나도 다를바 없었다. 어쩌면 그들이 백인들의 삶보다 더욱 고차원의 삶의 철학을 가졌고, 이를 실천하면서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기술적인 능력에서 많이 뒤처진 인디언들은 결국 백인들에게 자신들의 안방을 내주었고 과정에서 많은 고통을 겪고 피를 흘렸다
.
'
인디언추장연설문' 백인들이 처음 아메리카땅으로 이주해오면서 부터 초기아메리카 개척시대 전반에 걸쳐 인디언들이 받은 고통과 부당함을 호소하는 글들로 쓰여있다. 여기에는 인디언들이 터전을 빼앗기고 자신들이 문명이 유린당하는 과정속에서 많은 고통들을 겪음으로서 인디언들의 삶이 송두리채 뿌리뽑히는 과정이 들어있다. 대부분의 연설문의 요지가 그렇다. '우리는 당신들과 약속을 지켰지만 당신들은 약속을 지키지 않습니까?' 에서 시작하여 마지막 즈음에는 '우리도 당신들과 같은 사람입니다. 우리도 당신들처럼 자유롭게 해주십시오'라는 하소연으로 까지 이어진다
.
아메리카 개척사는 인디언의 멸망사이다. 초기에 호의로 받아주고 돌봐주던 백인들에게 배신을 당한 인디언들에게는 치욕의 역사이다. 물론 세계사의 흐름속에서 미국의 존재는 현재의 인간평등의 시대에 많은 역할을 했지만 속에는 인디언들의 피가 서려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여기에 나오는 추장들은 하나같이 인디언들에게 있어 위대한 인물들이다. 그들은 대부분의 인디언들에게 존경받았고 통치력과 용맹스러움을 인정받았던 위대한 인물들이다. 그런 그들이 자신의 사상을 펼치기 보다는 하나같이 평화롭게 누울 땅과 먹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 풍족했던 그들이 백인들에게 온갖 약탈을 당하고 나서 결국 나약한 존재로 전락해 자신들이 가난하다고 하소연하며 백인들에게 구걸하고 있는 것이다
.


인간의 역사라는 것이 정말 허무하다는 것을 다시금 느낀다. 나는 어렸을때 어른이 되면 무언가 대단한 세상이 펼쳐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일들이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상식적일 것이라고 생각했고, 권위적이고 정당한 틀속에서 모든 것이 진행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성인이 지금에 모든 기대는 무너졌다. 어른들의 세상도 어린이들의 세상과 별반 다름이 없음을 느낀다. 어쩌면 어린들의 모임과 행사가 더욱 활기차고 부끄럽지 않았다. 그때는 적어도 솔직했으며 더욱 진지했다. 인간이 문명화 되면서 욕심이 더욱 사악해짐을 느낀다. 사악해진 욕심은 결국 인간의 문명을 스스로 파괴하게 된다. 그런 역사적 시행착오를 얼마나 많이 겪어왔던가
...
이런 의미에서 인디언의 역사는 더욱 슬프다. 그들은 자신들을 문명화 시키지도 않았고 그럴 생각도 없었다. 그들의 순수했고 현명했다. 최소한의 적정선을 지켰고 정의로움을 최고의 덕으로 삼았다. 그런 그들이 결국 다른 문명에 의해 멸망되었다
.


나는 인디언의 멸망에서 지금의 지구멸망을 엿본다. 선생님께서 어떤 책의 인디언의 말중에 '백인들도 결국 자신들과 비슷하게 살아가게 '이라고 예견했다고 하셨다. 사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문명이 백인들의 문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들이 자신들끼리의 싸움을 끝내고 이제는 자신들의 어머니인 지구와 싸우고 있다. 지구를 송두리채 정복하려는 것이다
.
인디언 연설문에 보면 풍요로웠던 자신들의 땅이 황폐해져감을 하소연하는 대목이 종종 나온다. 이렇듯 현재의 인간문명자체가 지구를 황폐화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인디언의 영혼' 보면서 지금의 문명이 인디언 문명의 반만 닮았어도 좋았을 것이란 생각을 하였다
.
선생님께서 강의하시면서 가끔 인디언의 삶을 살아야 하지만 그렇지 못함을 한탄하시는 말씀을 종종 하신다. 이미 생활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로서는 물론 인디언처럼 야생으로 살아가기에는 너무 늦었다. 하지만 그들의 삶의 자세, 철학은 반드시 되새기고 본받아야 한다. 이는 문명이 멸망시킨 인디언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기도 하고, 우리가 앞으로 살아남기 위한 희망이기도 하다
.

 

♣ 인용3.   http://blog.ohmynews.com/cjc4u/250985

책읽는 즐거움 2009/02/04 08:00 최재천의시사 큐비즘에서

 

물신주의를 비판하는 시애틀 추장의 편지가 있습니다. 법정 스님께서도 즐겨 애용하시고, 류시화 선생께서 펴낸 책에도 실려 있고, 저도 글을 읽고 감동을 받아 수차례 글에 인용하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공기를 사고팔 있단 말인가? 대지의 따뜻함을 어떻게 사고판단 말인가? … 부드러운 공기와 재잘거리는 시냇물을 우리가 어떻게 소유할 있으며, 또한 소유하지도 않은 것을 어떻게 사고팔 있단 말인가? 햇살 속에 반짝이는 소나무들, 모래사장, 검은 숲에 걸려있는 안개, 눈길 닿는 모든 , 잉잉대는 꿀벌 마리까지도 우리의 기억과 가슴 속에서는 모두가 신성한 것들이다. … 우리는 대지의 일부분이며, 대지는 우리의 일부분이다.

우리가 대지를 팔아야 한다면, 당신들은 알아야 한다. 공기 또한 우리에게 더없이 소중한 것임을,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게 숨결을 불어넣어 주는 것이 공기이며, 모든 아침마다 우리가 맞이하는 것도 공기다. 바람은 나의 할아버지에게 숨과 마지막 숨을 주었다. 바람은 우리 아이들에게도 생명을 불어다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대지에게 일어나는 일은 대지의 아들들에게도 일어난다. 사람이 삶의 거미줄을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사람 역시 올의 거미줄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가 거미줄에 가하는 행동은 반드시 자신에게 되돌아오게 마련이다. … 대지는 인간에게 속한 것이 아니며, 인간이 오히려 대지에게 속해 있다. 그것을 우리는 안다."      시애틀 추장

          

그런데 연설의 진실이 사실과 다르다는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물론 충격입니다만, 한번 요약해 보았습니다
.

백인들이 발음하기 쉽게 시애틀Seattle이라고 이름을 고쳐 부른 수콰미시족의 세알트Sealth 추장은 결국 미합중국 정부에 자신들의 땅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들이 거부하면 백인들은 강제로라도 땅을 빼앗을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백인들은 시애틀 추장의 아버지인 슈웨아베 추장 시설에 두와미시족과 수콰미시족이 사는 땅으로 들어와 살았다. 그들은 서로 평화롭게 지냈다
.

이렇듯 인디언과 백인 입주민들은 대체로 평화롭게 이웃하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 프랭클린 피어스 대통령의 요구가 인디언들에게 통보되었다. 지금 살고 있는 땅을 팔고 퓨젓사운드 만의 섬에 있는 보호구역으로 이주하라는 것이다. 시애틀은 어쩔 없이 동의했다. 1854 12 아니면 1855 초였을 것이다. 시애틀 추장은 매각 협상 막바지 무렵에 미국 대통령을 향해 연설을 했다고 한다. 대통령은 없고, 아이작 스티븐스 주지사만 참석한 자리였다
.”

연설자료는 오직 하나밖에 남아있진 않습니다. 인디언 말을 안다는 헨리 A. 스미스 박사가 추장의 드와미시어 연설을 받아 적은 자료입니다. 연설내용은 실제 연설이 있었던 날로부터 33년이 지난 1887 10월에야 언론에 공개됩니다. 그런데 이때까지는 환경과 관련된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생태학적 경고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주로 인디언 부족의 슬픈 이별을 노래하고, 인디언의 생존을 걱정합니다. 물론 땅과의 연대성은 강조됩니다. 그로부터 수십 년이 흘러 1960 윌리엄 애로스미스라는 교수가 연설문을 수정합니다. 이때까지도마지막 나무가 베어져나가고, 마지막 강이 더렵혀지고, 마지막 물고기가 잡힌 뒤에야 그대들은 깨달으리라. 돈을 먹고 살수는 없다는 것을부분은 없었습니다
.

1970
년대 텔레비전 다큐멘터리(home)'에서 다시 한번 변용을 거친답니다. 여기서도 앞의 문장은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방송을 계기로 시애틀 추장은 환경운동의 대변자로 끌어올려졌습니다. 방송작가 테드 페리의 작품입니다. “땅은 인간의 것이 아니라, 인간이 땅의 일부라는 말도 페리가 지어낸 말입니다. 그러다가 환경운동에 관심 있는 사람들 사이에 인기를 끌게 되고 텍스트의 변용이 다시 한번 있게 됩니다. 마침내 새로운 버전이 나타납니다. 앞의 문장입니다. 버전이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다만 1970년대 초일 것으로 추정합니다. 앞의 유명한 문장은 그린피스의 스티커와 캠페인에 사용되면서 더욱 유명해집니다
.

마지막 나무가 베어져나가고, 마지막 강이 더렵혀지고, 마지막 물고기가 잡힌 뒤에야 그대들은 깨달으리라. 돈을 먹고 수는 없다는 것을
.”

그런데 시애틀 추장이 정말 무슨 말을 했는지, 실제로 그런 연설을 하기는 했는지를 두고 1990년대 초에 비판적인 의견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아메리카 원주민 지도자들도 그런 의견에 힘을 실어주었다. 이후 유명한 금언에 대한 새로운 설명들이 쏟아졌는데, 지금은 이것이 크리족 인디언의 예언이라는 견해가 점차 힘을 얻고 있다
.”

마지막 이야기는 혹여라도 읽는 분들을 실망시킬까봐 걱정됩니다만, 그래도 정확한 사실관계를 알려놓아야 같아서 적어놓았습니다
.

"
인디언 영토의 양도와 관련해서 미국 정부의 두와미시 부족 사이에 맺은 포트 엘리엇 조약 이후 인디언 봉기가 일어났다. 3 지속된 반목과 적대 행위 속에서 시애틀 추장은 한결 같이 백인 주민들 편에 섰다. 기독교로 개종한 그는 1866 노아 시애틀이라는 이름으로 여든 살의 일기를 마감했다
."

이상은 헬게 헤세 (Helge Hesse) 분이 쓰고, 박종배 님이 옮긴 북스코프 출판사의 <천마디를 이긴 한마디> 297~302면에 나와 있는 이야기입니다

                                                         '천마디를 이긴 한마디', 헬게 헤세

1.       옥단소 2009/02/05 11:15

큐비즘에 걸맞는 좋은 이야기 입니다. 사실 저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시애틀이란 사람 보다는 말을 이가 바로 인디언이었다는 사실에 착목했을 겝니다. 출처가 인디언 부족의 예언일 가능성이 높다하니 어쨋든 연설문의 내용은 훼손되지 않는군요. 백인들에게 가장 우호적이었던 인디언 추장의 이름을 빌어 인디언의 저항의 메세지가 전승되었다니, 미국이 얼마나 인디언을 가혹하게 축출하였는 지를 간접적으로 말해주는 같군요.

 

♣인용4. http://cafe.daum.net/lureloving/LWJz/1107?docid=HBbl|LWJz|1107|200604071840

녹색평론선집 1(1993), 김종철역, 녹색평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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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해설-

미국 서부지역에 거주하던 우아미쉬-수쿠아미쉬족의 추장 시애틀의 연설문을 소개한다.
연설이 행해진 것은 1854, 미합중국대통령 피어스에 의해 파견된 백인 대표자들이 인디언 부족이 전통적으로 살아온 땅을 것을 제안한 데서 비롯되었다.
지금의 워싱턴주에 해당하는 지역 토착민들의 삶터를 차지하는 대신에 그들이 "평화롭게" 있는 보존지구를 주겠다는 것이 백인정부의 제안이었다.

여기에 대하여 몸집이 장대하고 우렁찬 목소리를 가졌다고 전해지는 시애틀추장은 다음과 같이 답하였는데, 거의 시적이라고 만한 연설문은 오늘날 환경과 자연에 대한 분별없는 파괴의 결과로 인하여 인류가 심각한 고통에 직면하게 시대에 오히려 생생한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19세기라는 한정된 시대를 뛰어넘어서 지금의 우리들에게 감동적으로 전해오는 연설문의 아름다움과 진리성은, 본질적으로 우주와 세상을 조화로운 질서 있는 하나의 전체로서 보는 통합적 비전으로 나오는 것이라 있다.
그리고 이러한 통찰력은 실은 인류사의 오랜 전통에서 많은 현자들과 신비가들에게, 그리고 많은 구전전통에서 알려진 세계관에 뿌리를 것이다.
자연에 근거한 소박한 언어와 이미지와 비유를 가지고 시애틀추장은 존재의 위대한 신비와 인간의 삶터와 창조주와의 관계에 대한 직관적인 인식을 표현한다.

우리가 연설문에 나타난 생각을 단지 원시자연숭배나 애니미즘의 선언으로 간주한다면, 발언속에 포함된 깊은 진리를 지나쳐버리게 것이다.
시애틀추장은 지구 "어머니의 " 혹은 " 자아로서의 " 주목하여 인간이란 자연속의 먼지나 아이와 같은 존재임을 환기하고, 그러면서도 인간에게는 땅을 지키고 보호할 거룩한 임무가 창조주로부터 주어져 있음을 주목하기도 한다.
생명에 대한 봉사의 정신과 깊은 겸손의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인간적 위엄을 가지고 그는 자신과 자기 부족의 전통에서 깨우친 진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백인의 난폭한 욕망이 필연적으로 토착적 전통가치를 파괴하고, 인디언 문화의 멸망을 초래할 것임을 내다보면서도 창조주의 자비로움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견지한다.
그리하여 그는 "바다의 파도처럼 왔다가 가는" 인간의 근본적인 운명을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우리 모두를 세상만물의 무수한 다양한 형태 속에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는 하나의 거룩한 존재를 발견하도록 초대하고 있다.
인디언 문화의 근본적인 비폭력성과 그들이 느끼는 우애와 형제애의 중심에는 실로 이러한 거룩한 존재에 대한 보편적인 인식이 깔려있는 것이다.
인식은 모든 것이 상호 빈틈없이 연결되어 있는 우주의 근원적 구조를 알게 하고, 모든 존재, 모든 사람이 참으로 공통한 운명에 종속되어 있음을 알게 한다.

이러한 커다란 통합적 비전이야말로 진정하게 비폭력적인 삶의 기술을 보장하는 원천이 아닐 것인가?
우리가 이러한 비전에 동참할 것인가 어쩔 것인가는 자유롭게 선택해야 문제이지만, 이것을 완전히 무시할 우리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파국에 직면하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모든 존재의 공통한 운명과 상호의존성에 언급하는 인디언 추장의 발언에 귀기울인다는 것은 우리가 좀더 겸손하고 책임감 있는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김종철·         

주: 사전 양해없이 인용하여서 죄송합니다.   말씀하시면 삭제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