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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글

[스크랩]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풍경 / 류시화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풍경 

 

 

                            / 류시화




나는 아마도 전생에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풍경'이 아니었나 싶다.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풍경을 구경했지만, 내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늘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풍경이다.

오늘도 나는 산책하러 나가서 동쪽 중산간 지대의 키 큰 삼나무들 사이로 바라보이는 풍경을 구경했다. 오랜만에 그림을 그려볼 양으로 화구(畵具)를 챙겨 나섰지만 봄 햇살을 맞으며 막연히 돌무더기 위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흡족했다. 가끔 오가는 허름한 차림의 농부들이 평화로움을 더해주었다.

많은 예기치 않은 일들이 찾아오는 것이 삶이긴 하나 시간의 흐름 자체에는 변함이 없다. 어느덧 나는 이 섬에 와서 한 해를 보냈다. 그러는 동안 저 나무들 사이로 많은 것이 지나갔다. 그중에는 눈에 보이는 것도 있었고 보이지 않는 것도 있었다. 그러나 세상은 차츰 눈에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의 자리를 가로채 버렸다.

지난겨울에는 무릎까지 쌓이는 폭설이 내려서 저 나무들을 포함한 들판 전체를 온통 하얗게 뒤덮곤 했었다. 그럴 때면 눈밭에서 들쥐들이 먹을 것을 찾아 돌아다니는 것이 눈에 띄기도 했다. 나는 나무들 사이에 서서 들쥐들의 발자국을 헤아려보기도 하고 멀리까지 눈 덮인 들판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기도 했다.

어떤 계절이라 해도 일렬로 늘어선 이 삼나무들이 없으면 그 멋이 덜하리라 생각하면서 나는 종이 위에 나무들부터 그렸다. 그다음에 나무 사이로 보이는 들판과 돌무덤과 언덕배기를 그려넣었다. 그림을 그리는 사이 해는 언덕 아래의 움막을 그늘에 잠기게 하고 그 대신 건너편 물웅덩이를 명랑하게 일깨웠다.

그림을 대충 끝내고 나서도 나는 나무 사이로 바라보이는 풍경을 앞에 두고 한참 동안 돌무더기 위에 앉아 있었다.

삶은 많은 요소에서 우리에게 더 가까이 다가오라고 요구한다. 멀리 있으면 안 된다. 더 가까이 오라. 그렇게 온갖 것들이 자신의 가치를 호소하고, 욕망은 그 대상에 더 가까이 가지 못해 아쉬워한다. 그래서 욕망을 가로막는 중간지대의 장애물을 걷어내는 일이 누구에게나 인생의 목표가 되어버렸다.

나 또한 그런 위험에 빠져들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내가 할 일은 중간지대에 나무들을 배치하는 일이다. 그리고는 그 나무들 사이로 내 욕망의 대상들을 바라본다. 나무들 사이를 지나가 그 대상으로 다가설 순 있지만, 나무들이 있기에 무작정 달려가진 못한다. 한 번쯤은 잠깐이라도 멈춰 서야 한다. 중간에 서 있는 나무들은 욕망의 풍경 속으로 내달리는 나를 잠깐이라도 멈추게 하고, 그 틈에 한번이라도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만든다.

사물은 때로 가까이 들여다봐야 할 필요가 있으나, 욕망의 대상은 오히려 거리를 두고 바라볼 필요가 있다.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풍경이 나에게 일깨워주는 것도 그것이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나는 한 달에 두세 번은 꼭 중산간 지대의 들판으로 걸어나가서 나무들의 풍경을 마주하겠노라고 마음먹는다. 그것은 내 마음에 평화를 주고, 때로는 한낮의 햇살 속에서 욕망이나 욕망의 대상이 사라진 세계로 나를 이끌어간다. 온전히 나 자신과 마주할 수 있는 곳, 이름도 없고 언어도 없이 진정한 나의 세계와 마주할 수 있는 곳으로.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풍경을 마주하고 서 있으면서 나는 인간이 자연과 본래의 관계로 다시 돌아가야 함을 일깨우는 것이 종교와 문학의 사명이라고 알게 되었다. 종교와 예술은 결국 나 자신 속의 자연, 나 자신의 영혼을 들여다보게 하는 '나무들 사이의 풍경' 같은 것이라고 알게 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까지나 자기 자신과 만날 수 없다. 사람들은 들판의 나무를 베어 넘기듯이 욕망과 자기 자신 사이에 세워져 있는 방풍림까지 모두 다 베어버렸다.

마음이 한가롭지 못하고 뜻없는 사념이 머리를 어지럽힐 때, 내가 나 자신을 잃어버린 듯할 때, 그럴 때면 나는 오늘처럼 중간산 지대의 나무가 있는 풍경 속으로 산책을 떠난다. 산책은 나 자신을 만나러 가는 더없이 좋은 방법이다.

산책의 끝에 이르러서는 들판의 돌무덤 위에 앉아서 그림을 그리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나는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풍경과 하나가 된다. 그곳으로 하늘도 보이고 바다고 보인다. 흰 구름이 들판에 그림자를 드리우기도 한다. 그 풍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나는 더없이 한가롭고, 내 본래의 모습으로 다가서게 된다. 생의 한때에 찾아오는 충일함의 시간이다. 그래서 나는 아마도 전생에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풍경'이 아니었나 생각해보는 것이다.


<달새는 달만 생각한다> 중에서

 

 

  Fly To Imagination (상상의 나래)

 

 

출처 : 꿈꾸는 정원에서
글쓴이 : 희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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